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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D 문화 브로셔 Sep 21. 2022

1984년 리뷰

왔으나 오지 않은 미래

1984년 그리고 디스토피아     

 1984년은 1849년에 출간된 조지 오웰이 쓴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자먀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알려져 있다. 원래 조지 오웰은 “유럽 최후의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구상했으나 출판사의 제안으로 1984년으로 제목을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쓴 해인 1948년을 자리 바꿈하여 1984년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1984년에 맞추어 ‘1984’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다. 원작 소설을 제대로 재현했다는 평을 받기는 하였으나 흥행에는 그닥 성공하지 못했다.

 1984년은 일반적으로 국가가 강력한 감시체제를 구축하여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소설로 알려져 있다. 빅브라더라는 말로 대신 되는 강력하고 세밀한 감시체제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이 소설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파시즘과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보면서 조지오웰이 강력한 통제의 전체주의 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졌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러한 감시체제에 대한 묘사는 그다지 독특하게 돋보일만한 것은 아니다. 텔레스크린이라고 하는 감시도구로 나타나는 직접적인 감시는 조지 오웰의 독특한 아이디어라고 보기도 어렵다. 조지 오웰이 더 하고 싶었던 말은 다른 부분으로 보인다. 과거를 조작하고, 언어를 조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그 시스템이 더 하고 싶었던 말로 보인다. 영화에서도 주된 내용과 줄거리에서는 큰 변화가 없으며 주제 의식도 유사하게 이어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4년은 특히 자유주의 국가에서 더욱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 특히나 더욱 사람들의 숭상과 칭찬을 받는 작품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되고 읽혀지고, 보여지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는 1984년에 대한 한 가지의 획일된 해석으로 인한 것이긴 하다.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 공산주의의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비판, 공산주의의 공포스러운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소설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실 조지 오웰의 비판은 공산주의만의 문제는 당연 아니었다. 전체주의와 통제 시스템의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더더욱 정교하고 치밀해져 있다. 냉전의 종전 이후 자본주의 체제로 세계가 통합되어가는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억압과 통제적 요소들을 찾아내고 비판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이다.     

대형이라는 시스템     

 대형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나와 있지 않으며 사실상 대형이란 바로 그 시스템이다. 그래서 대형은 단일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각각의 개별적인 다양한 양태로만 파악된다. 이것은 그 반대의 양상인 골드슈타인이나 혁명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단일하게 통일된 조직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내부 조직원들마저도 단일하게 서로를 인지하지 못한다. 대형은 그저 상징물일 뿐 억압과 통제의 시스템은 실체적으로 단일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공격 하고자 해도 공격을 할 대상이 없다. 그것들은 이미 우리들 안에 스며들어 착고 되어 버린 시스템이다. 우리의 몸 안에 스며들어 있기에 그것을 발라낸다는 것은 우리 몸을 베어내야 하는 만큼의 고통과 노력이 따르는 일이다.

 텔레스크린이라는 직접적인 통제와 감시는 사실 강렬하기는 하지만 세밀한 맛은 없다. 너무나도 직접적인 통제 방식이기에 너무 눈에 띈다. 집회에서의 세뇌 방식도 진부한 편이다. 사실 더 충격적인 방식이란 과거를 바꾸는 방식이나 영구 전쟁을 통한 빈곤의 지속과 같은 것들이다. 미디어와 정보가 통제되면 세상의 모든 일은 권력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추진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모습으로 추진을 해도 미디어와 정보에서 전혀 다르게 전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철저히 믿게 만든다면 권력은 세상을 완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 수 있게 된다.

 몇 가지 세부적인 아이디어들은 현재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보여준다. 전쟁이 계속 되는 것은 여러 면에서 통제에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관심을 전쟁으로만 이끌고 감으로써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하는 것. 2분간증오와 같은 시간을 통해 감정을 모두 소진해버리도록 함으로써 다른 곳에서 감정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 증오할 적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권력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      


언어의 통제     

 칸트가 물자체가 있고 사람의 범주 내로 인지되는 것만이 현상적으로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런 측면을 더 발전시키면 쇼펜아워 말처럼 세계는 표상의 합이 되어버린다. 거기서 사람이 인식하는 표상이란 이성화되려면 필연적으로 언어의 필터를 거쳐야만 한다. 인간이 관념적으로 구성하는 세계는 언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하며 사람들에게 실제로 의미 있고 영향을 주는 세계란 곧 언어로 구성된 세계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생각이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를 조정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조정하는 것이 된다. 언어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관념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언어의 구조, 언어의 세계를 조정하는 자는 곧 세계를 조정하는 자가 되고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생각을, 사람 자체를 조정하는 자가 됨을 의미한다.

 1984년에서 정치 권력은 집요하게 보일 정도로 언어를 장악하고, 조정하고 통제하고자 한다. 신어의 공급은 사람들의 생각하는 방식 뿐 아니라 생각 그 자체를 바꾸어 버리게 된다. 조지 오웰의 깊은 통찰은 사실 이러한 부분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언어에 대한 작업은 의미의 조작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를 소멸시킴으로써 진행이 된다. 사람들의 생각 자체를 줄여놓는 것이다. 종이에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 또한 사람들의 사고가 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행위이다. 재미있는 것은 반대적 의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특히 정부에 반하는 부정적 의미의 단어를 긍정적인 단어로 바꾸어 씀으로써 아예 부정적인 생각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중사고의 수용     

 서로 모순된 내용을 실제로 믿게 되어 버리는 사고를 이중사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너무나도 뻔한 거짓말을 믿도록 만드는 반복과 세뇌, 공포의 작용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공중파 미디어와 종편의 미디어를 하루 종일 보는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을 머리 속에 강하게 심게 된다. 비판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모순적인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운동권 출신이면서 반페미니스트인 경우도 많고, 진보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도 일의 수행 방식은 매우 폭력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이중사고가 가능할 수 없다는 이성적 사고 판단과 달리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매우 잘 표현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그 모순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시 사고하지 않는다.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모순적인 사고를 동시에 갖게 되는 이중 사고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갖고 있다. 특히 계몽주의와 모더니즘에 근거하는 단일한 진리에 대한 확신과 최근의 다원주의적 진리관은 대부분의 동일한 사람 안에서 이중사고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중사고는 현대의 대표적인 특질이라 할 수 있겠다. 이중사고로 인해 현대인은 끊임없이 항상 흔들리고 불안하며 삶의 양태는 상대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의 대조     

 멋진 신세계(1932)가 쓰여진 후 10년이 훨씬 지나 1984년이 나왔다. 1932년과 1948년은 불과 10여년의 차이지만 시대적 사조에 있어서는 매우 큰 변화가 있었다. 19세기 이후부터 있었던 계몽주의와 이성에 대한 신뢰는 줄곧 과학의 발전이 인간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세상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차게 하였다. 그러한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에 이은 세계 대공황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것이 2차 세계대전이다. 멋진 신세계가 나온 1932년은 그러한 이성에 의한 유토피아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무너지는 징조만이 보이던 시기였고, 그래서 멋진 신세계라는 디스토피아에는 아직 과거의 유토피아적 모습이 남아 있고,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정도였다. 1948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이 확고히 자리잡아가는 시기였다. 그래서 1984년은 훨씬 전적으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낼 수 밖에 없었다.

 멋진 신세계에서의 질문은 과거의 인간의 발전에 대한 믿음에 던져지고 있다. 인류 과학의 발전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 공상적 공산주의적 이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서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1984년에서는 그러한 이상의 실현은 아예 거론되지도 못한다. 거기서 그리는 미래란 암울 그 자체이다. 가장 절망스럽고 암울한 상황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먼진 신세계와 1984년은 인간이 어떻게 몰락해가는가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1984년에서 인간이 쾌락을 상실 당하고, 극도의 억압과 직접적인 통제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상실해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으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최대의 쾌락을 획득하고, 고통을 상실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듯 보이는 가운데 인간의 모습을 상실해 간다.

 1984년에서는 정보가 조작되고, 상실되고, 주어지지 않음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황폐화시킨다. 현실에 대해 의심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인간을 억지적 노동 속에 파묻는다. 그러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지고, 너무 많은 쾌락이 주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황폐화시킨다. 쾌락을 찾아 좇아 다니느라 현실에 대한 생각과 사유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1984년에서는 미디어를 통제하고, 정보를 조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조정하고자 하나 멋진 신세계에서는 미디어를 다양화하고, 미디어를 엔터테인먼트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다른 쪽으로 이끌어 나간다.

 지금 현재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멋진 신세계가 그리고 있는 모습은 현재의 위험성을 더욱 제대로 묘사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84년은 왔는가?     

 1984년이 지난지도 30년이다. 한국의 1984년은 차라리 희망이 넘치던 시대였다. 아시안게임을 통해 한국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경제는 계속 활황이었다. 점점 축적되는 자본과 늘어나는 생산 물자로 본격적으로 풍요함을 맛보기 시작한 시대였다. 물론 정치적 시대환경은 어두웠으나 경제적 환경과 발전하는 문화적 양상으로 사람들은 그러한 정치적 상황을 잊고 지냈다. 이제 21세기가 시작된지도 한참 지난 이 때에 차라리 사람들은 매우 어둡고 불안한 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70-80년대의 군부 통치 시대에서 사실상 감시와 통제의 사회에서 살아왔던 우리는 90년대를 지나며 점차 민주화의 진전과 민주 정부의 수립으로 그러한 것들에 대한 문제 의식의 날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보수 정부의 수립으로 우리는 미디어와 언론에 대한 권력의 장악과 표현의 자유의 억압을 다시 맛 보게 되었으며, 보수 정부의 재집권으로 강화된 여건은 이제와 1984년을 다시 돌아보게끔 만들었다. 물론 1984년에서 묘사되는 만큼의 무자비한 통제 사회까지는 아니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억눌려지고,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 조작되고 있는 상황을 맞으며 조지 오웰의 비판적 예언이 결코 틀리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권력의 감시와 통제가 점점 치밀해지는 만큼 미디어의 영역도 크게 변하여 전 미디어 영역을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전쟁 상황이라는 극단 상황으로 모든 발전을 억압함으로 통제의 영속을 꿈 꾸던 1984년의 배경과는 달리 과학의 발달과 미디어 영역의 발전은 한 정부가 미디어 영역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또한 새로운 미디어 영역은 과거와 같이 전문 집단의 필터를 거치는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시민들의 소통이 가능하게 함으로써 과거만큼의 통제와 조작조차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권력의 미디어에 대한 장악 시도도 계속됨에 따라 새로운 미디어 영역인 인터넷과 SNS에도 끊임없이 조작과 개입을 시도하였으나 그것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인 상태다.

 국가 권력의 문제가 자본 권력의 문제로 전화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국가 권력의 미디어 장악과 언론 조작에 대한 걱정보다 자본에 의한 장악이 더욱 걱정되던 시기였다. 시대가 거꾸로 돌아 다시 국가의 미디어 장악을 걱정해야 되는 시기가 되었다. ‘1984년’은 우리에게는 가까이 왔다 다시 멀어졌다 하며 온 것인 동시에 오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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