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개 목동 다윗은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정치로 다시 보는 성경 인물

by ND 문화 브로셔

우리는 주일학교에서 다윗을 배운다.

양을 치던 순수한 소년, 물맷돌 하나로 거인을 쓰러뜨린 믿음의 영웅, 왕의 핍박을 묵묵히 견뎌낸 인내의 아이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행간을 현실 정치와 권력 투쟁의 눈으로 읽어내면, 그곳엔 전혀 다른 얼굴의 사내가 서 있다.

그는 낭만적인 목동이 아니라 거친 용병이었고, 억울한 도망자가 아니라 치밀한 군벌이었으며, 신의 뜻을 마냥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왕관을 쟁취한 야심가였다.

이 글은 신학적 교리가 덮어놓은 ‘신화의 베일’을 걷어내고, 고대 근동의 황량한 광야에서 펼쳐진 가장 성공적인 쿠데타와 권력 쟁취의 역사를 복기하려는 시도다.

다윗은 어떻게 ‘일개 목동’에서 ‘이스라엘의 제왕’이 되었는가?

그 답은 기적이 아니라, 피 냄새 진동하는 현실 정치 속에 있다.


1.만들어진 영웅: 골리앗 신화와 투석병 다윗


일기토의 허상

고대 전쟁사에서 장수 간의 일대일 대결은 고도의 격식을 갖춘 의식이다.

중무장한 거인 장수 앞에 도시락을 배달 온 민간인 소년을 내보내는 미친 지휘관은 없다.

장수는 커녕 정규 군사도 아닌 시골에서 올라온 도시락 배달 소년이 골리앗이라는 적군의 대장수와 싸우는 일이 있다는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성경에는 다른 기록이 있다. 사무엘하 21장 19절의 기록에는 골리앗을 실제로 죽인 것은 무명의 용사 '엘하난'이었다고 기록한다.

이는 훗날 다윗 왕조의 역사가들이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 공적을 다윗의 것으로 가져와 윤색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unwqhgunwqhgunwq.png 이미 공격당해 죽어가는 골리앗을 발견해 죽인 후 공적을 가로챘을 수도 있다


목동이 아니라 ‘특수 병과(투석병)’였다

다른 가능성을 보자.

다윗이 단순히 도시락 배달꾼이었을 확률이 매우 낮다면, 그는 단순한 양치기가 아니었고 최소한 정규 군사였을 것이다.

당시 투석구는 활보다 긴 사거리를 가진 치명적인 살상 무기였고, 다윗은 ‘숙련된 투석병’ 자격으로 참전했을 것이다.

그는 난전 중에 적의 작은 하급 지휘관을 저격하는 전공을 세웠고, 이것이 훗날 드라마틱한 ‘소년 대 거인’의 대결로 신화화되었다는 가설을 상상해볼 수 있다.


엔터테이너이자 호위무사

다윗의 궁정 진입은 우연이 아니다.

다윗이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무명의 시골 음악가가 궁정으로 불려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골리앗을 무찌는 공적이 있어서 불려갔을 수 있겠지만, 앞서 보았듯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면 다윗은 궁정에 들어가기 위해 매우 큰 노력을 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그 과정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는 않다.

어쨋든 다윗은 사울 왕의 정신병(악신)을 달래는 ‘음악가(심리 치료)’이자, 왕의 등을 지키는 ‘무기 든 자(경호실장)’라는 이중 신분으로 왕의 최측근 정보를 장악했다.

그는 사울의 품 안에서 권력의 생리를 배웠고, 군 내부의 인맥을 형성하며 미래의 칼을 갈았다.


2.광야의 대부: 깡패 두목이 된 다윗


아둘람의 무법자들

사울에게 쫓겨난 다윗이 숨어든 아둘람 굴에 모인 400명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였다.

즉, 사회 부적응자와 범죄자 집단이었다.

한 고조 유방이 건달들을 데리고 천하를 도모했듯, 다윗은 이 거친 패거리의 ‘보스’가 되어 세력을 키웠다.

다윗은 정규 군사로 제대로 선발되어 장수가 된 케이스가 아니다.

그는 지방의 한 곳에서 건달들을 모아 다스리던 현대로 치면 깡패집단의 두목 같은 지위였을 수 있다.


나발 사건: 조폭의 비즈니스 모델

다윗은 어떻게 조직을 먹여 살렸을까?

나발 사건(삼상 25장)은 그가 ‘보호비 갈취’를 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너희 양 떼를 지켜줬으니(털지 않았으니) 대가를 내라”는 요구는 전형적인 조폭의 논리다.

거절당하자 “남자를 다 죽이겠다”고 출정한 것은, 구역 관리 차원의 본보기식 응징이었다.

아비가일의 조공은 사실상 밀린 보호비의 결제였다.


소급된 정통성: 기름 부음의 미스터리

성경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사무엘이 신의 계시를 받아 당시 아무 것도 아니었던 다윗을 찾아가 왕이 될 사람이라 예언하고 기름을 부었다고 하지만 정치적인 현실을 고려해보면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이야기다.

사무엘이 은밀히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이야기는 목격자가 가족뿐이다.

이는 다윗이 내전으로 정권을 잡은 후, “나는 원래부터 선택받았다”고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후적 창작물일 확률이 높다.

그는 죽은 사무엘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왕권 찬탈을 ‘신의 섭리’로 포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배신과 기회주의: 이중간첩의 줄타기


미갈과의 결혼: 신분 상승의 사다리

다윗이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기 위해 포피 200개를 베어 온 것은 사랑 때문이 아니다.

천민 출신이 왕족으로 진입하기 위한 필사적인 무력 시위였다.

‘미끼설’은 역사의 승자인 다윗의 사가들이 사울을 나쁘게 만들기 위한 프레임일 뿐, 다윗에게 미갈은 권력으로 가는 가장 빠른 사다리였다.

자신의 딸을 가지고 미끼를 만들어 결혼을 약속하는 계략을 세운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사울이 왕의 지위에 있으면서 다윗 하나 처지하는 것이 무엇이 힘들다고 자신의 딸을 내거는 위험한 도박을 하겠는가.


블레셋 망명: 위장인가 변절인가

다윗은 적국 블레셋으로 망명해 시글락 영주가 된다.

성경은 그가 아기스 왕을 속였다고 변호하는 장면만 나오지만, 당시 시대를 생각해 성경 뒤에 숨은 시대상을 보자면 당대 이스라엘 민중에게 자신의 민족을 버리고 블레셋에게 넘어간 다윗은 명백한 ‘매국노’이자 ‘배신자’였을 것이다.

블레셋에 망명해 있으면서 수많은 전투에서 이스라엘 지역도 침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차피 주변 지역 침략은 약탈을 위한 것이었을터 이스라엘 지역이라도 약탈을 해야할 때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유다 지역은 후일 자신의 기반을 삼으려 했었기 때문에 침략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지역을 침략했다고는 나와있지 않다.

승리한 다윗왕조의 사가들이 그것까지 기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4.적과의 동침: 7년의 내전과 반란 성공


발 빠른 분리 독립: 헤브론의 왕

사울이 죽자마자 다윗은 조문을 가는 대신 유다 지파의 중심지 헤브론을 점거하고 유다만의 왕이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권력 공백기를 틈타 자신의 지역 기반을 알박기 한 기민한 분리주의 전략이었다.

사실 이 과정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동네 건달들을 모아서 집단을 형성하고 보호비로 살던 두목에 불과했던 다윗이 그러한 지역 무력을 기반으로 용병 역할을 해서 작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이름을 날리고 이를 기반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왔을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당시 수많은 그러한 군벌들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저그런 용병집단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사울이 죽는 시점에 다윗은 왕이 될 야망을 가지고 유다 집단을 뭉치게 하여 유다의 왕을 선포한다.

이는 다른 수많은 군벌들과는 다르게 선도적으로 강력한 군사집단을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Gemini_Generated_Image_99jzfm99jzfm99jz.png 헤브론을 점령하는 것은 다윗의 가장 큰 모험이자 기회였을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리

사울 이후의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는 더 권위와 명분을 가진 것은 이스보셋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이 왕을 하는동안 왕권에 대해서는 사울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었을 것이고, 각 지파들도 사울 왕가에 대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사울 사후에 다윗을 따른 지파는 유다지파 뿐이었고, 다른 모든 지파는 이스보셋을 따랐다는 것을 보면 알 수있다.

성경에 기록된 야훼가 이미 다윗을 다음 왕으로 삼았다는 신화를 벗기고 당시 시대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해보면 사울 사후에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보셋이었고, 이에 대항해서 다윗이 자신의 지파인 유다 지파의 지지자들을 모아서 지방의 반란 세력을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침실의 스캔들과 내부 붕괴

북쪽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었으나 실권은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있었다.

7년 반의 지루한 내전의 균형을 깬 것은 칼이 아니라 ‘여색’이었다.

아브넬이 선왕 사울의 첩을 범하자 이스보셋이 이를 비난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아브넬은 적반하장으로 다윗에게 투항한다.

우리는 여기서 많은 전쟁사에서 자주 나오는 이간책의 전형을 보게 된다.

적군의 강력한 참모나 군사가 있을 때 이간책을 통해 그를 제거해서 승리의 발판으로 삼지 않던가.

다윗이 단순히 아브넬을 받아들였다고 나오지만 그 행간에 수많은 이간책과 전술이 있었음을 예상해볼 수 있다.

결국 다윗은 이 배신자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반란을 성공하는 기회로 삼는다.


암살과 정치적 쇼: 드디어 이스라엘 왕이 되다

이후 벌어진 일련의 암살 사건(아브넬 암살, 이스보셋 암살)은 다윗에게 너무나 유리하게 돌아갔다.

다윗은 정적들이 부하들의 손에 제거되도록 방치한 뒤, 그 암살자들을 처형함으로써 “나는 왕을 죽인 원수가 아니라, 원수를 갚아준 정의로운 통치자”라는 도덕적 우위까지 챙겼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추대는 이미 내전에서 승리한 다윗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다윗은 일개 목동에서 결국 이스라엘 전체의 제왕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기록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다시 살펴본 다윗은 모순덩어리 인간이다.

그는 살기 위해 미친 척 침을 흘렸고,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적의 품에 안겼고, 권력을 위해 자식의 죽음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다윗의 진정한 비범함이 드러난다.

그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왕이 아니었다.

그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배신과 음모가 판치는 지옥 같은 현실 정치판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스스로 왕조를 개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읽어야 할 것은 신비로운 기적이 아니다.

아무런 배경 없는 한 인간이, 자신의 약점과 시대의 한계를, 때로는 비열하고 때로는 잔혹한 정치적 처세술로 돌파해 나가는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다.

신화의 거품을 걷어낸 자리에, 비로소 피와 땀 냄새가 나는 ‘인간 다윗’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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