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가가 아니라, 피해의 언어를 넘어 책임의 자리로..

by 잡학거사

부부 갈등과 회복의 문제를 바라볼 때, 믿는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지점은 상대의 행동이나 감정이 아니라 θ 앞에서의 자기 자리로 많은 논의가 성격, 감정, 상처, 성별 구조로 전개되지만, 이런 설명들은 대부분 혼적인 차원에 머문다. 혼의 영역에서 문제를 해석하면 고통의 크기, 감정의 강도, 상처의 깊이가 곧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의 근원은 감정의 불균형이 아니라 질서의 붕괴로 θ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할 관계의 축이 흐트러질 때, 그 결과가 감정의 혼란과 관계의 파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회복은 감정의 합의나 심리적 설득에서 시작되지 않고, θ 앞에서 다시 서는 자리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현대 사회는 책임의 언어보다 피해의 언어를 더 강하게 사용하여, 누가 맡은 자리를 지켰는지를 묻기보다, 누가 더 아픈지를 묻는 구조가 일반화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약함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 면책의 근거로 작동하고, 강함은 책임의 자리가 아니라 잠재적 가해의 위치로 규정되며, 상처는 돌봄의 대상이기보다 판단권의 근거가 된다. 이 구조가 부부 관계 안으로 들어오면, 결혼은 회복의 공동체가 아니라 도덕적 재판의 장으로 변질되어 한쪽은 계속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피고가 되고, 다른 한쪽은 의도치 않게 판사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때 관계는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동행이 아니라, 누가 더 옳은지를 가리는 싸움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성경은 결혼을 강자와 약자의 구조로 결코 설명하지 않으며, 남편과 아내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지도 않고, 성경은 두 사람을 각기 다른 책임을 맡은 언약의 당사자로 부른다. 남편은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자리로 부름 받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책임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책임의 무게는 다를 수 있으나 책임의 존재는 동일하다. 이 질서가 무너지면, 남편은 자신의 책임을 방어하거나 회피하게 되고, 아내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관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이 둘 모두 θ 앞에서의 본래 자리가 아니다. 책임을 맡은 자가 책임을 회피할 때 관계는 흔들리고, 상처를 입은 자가 그 상처로 관계를 심판할 때 회복은 멀어진다. 회복의 전환점은 상대를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왜? 당신은 그렇게 했는가”라는 질문은 대부분 방어와 정죄를 낳는다. 반면 “θ 앞에서 나는 내 자리를 지켰는가”라는 질문은 회개와 변화의 가능성을 연다. 이 질문은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질문이다. 이 지점에서 관계의 방향이 달라진다. 감정의 충돌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지만, 그 충돌이 관계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중심이 사람에게서 θ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약자를 보호하는 계약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을 책임지는 언약이다. 결혼은 안전지대가 아니라 성화의 현장이다. 상처가 없다는 약속의 공간이 아니라, 상처를 다루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의 삶이다. 그러므로 피해자 프레임은 결혼과 공존할 수 없다. 피해자 프레임은 관계를 멈추게 하고, 책임 프레임만이 관계를 움직이게 한다. 믿는 사람에게 고통은 제거해야 할 불행이 아니라, θ 앞에서 다루어야 할 과제이다. 그러므로 “누가 더 아픈가”라는 질문은 신앙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이 질문은 고통을 외면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기준으로 관계의 권한을 재배치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아픔은 분명 돌봄의 대상이지만,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오늘의 사회는 아픔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넘어, 아픔을 말하는 자에게 도덕적 우위를 부여하는 구조로까지 나아갔다. 이 구조 안에서는 상처가 곧 설명이 되고, 설명은 정당화로 이어지며, 정당화는 책임을 면제하는 논리로 작동한다. 그 결과, “나는 이 관계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점점 사라진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을 없애는 종교가 아니라, 고통을 책임으로 통과시키는 믿음이다. 십자가는 가장 큰 피해가 가장 큰 책임으로 전환된 자리였다. 그리스도는 가장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의 죄를 짊어진 책임자로 서셨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이며, 믿는 사람의 삶이 따라가야 할 방향이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상처는 말해질 수 있어야 하지만, 상처에 머물 수는 없다. 상처는 θ 앞에 가져가야 할 고백이지, 관계 안에서 상대를 묶어 두는 족쇄가 아니다. 피해의 언어가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책임은 늘 강하다고 여겨지는 쪽으로만 이동한다. 남편은 설명해야 할 존재가 되고, 아내는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어느 누구도 살리지 못한다. 책임을 떠안은 자는 결국 지쳐 침묵하게 되고, 책임에서 벗어난 자는 성숙의 기회를 잃는다. 이것은 보호가 아니라 왜곡이며, 정의가 아니라 불균형이다. 성경은 약함을 이유로 책임을 면제하지 않으며, 강함을 이유로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는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힘의 균형이 아니라 자리의 분별이다. 책임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대의 고통을 무시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책임의 자리에 선 사람만이 상대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 피해자의 자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요구만 생기지만, 책임자의 자리에 설 때 비로소 돌봄이 시작된다. 이것은 남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아내 역시 자신의 상처를 θ 앞에서 다루며, 그 상처로 관계를 지배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돕는 배필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이때 관계는 힘의 싸움이 아니라 사명의 동행이 된다.


믿는 사람에게 회복은 권리를 되찾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되찾는 일이다. 사회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더 아픈 쪽이 보호받아야 하고, 더 강한 쪽이 책임져야 한다고. 그러나 신앙은 묻는다. θ 앞에서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설 때, 우리는 더 이상 피해의 언어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책임의 언어로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관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누가 더 아픈지를 따지는 자리에서 벗어나, 누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를 묻는 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부부는 다시 함께 설 수 있다. 이것이 믿는 사람으로서의 본질 회복이며, 바로 보고 바로 서는 삶의 실제적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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