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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st Feb 18. 2019

말 없이 말하기

‘언택트(Untact)’ 시대, 우리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작년 여름 무렵이었다. 오전에 수업을 다 끝내고 동료 선생님들과 같이 밥을 먹다가 우연히 스타크래프트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30대 후반 아재 세 명은 오랜만에 PC방을 가게 되었다. PC방에 들어가서 카운터 알바에게 “세 명 자리 주세요.”라고 이야기했더니 카운터 알바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보나?’ 하는 표정으로 “저기 가서 티켓 뽑아 오시면 됩니다.”라고 한다.


알바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기계가 하나 있다. 사용할 시간 입력하고 카드로 결제하면 자동으로 자리 배정이 되는 시스템인 모양이다.


30대 후반 아재 세 명이서 지혜를 모아 이 신문물은 도대체 어떻게 사용하는 건가 고민하니 그리 어렵지 않게 사용법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한 30분 정도밖에 안 걸려서 티켓을 뽑는 데 성공했다. 사실 이 일이 있기 며칠 전에 학교 앞 맥도널드 키오스크에서 힘들게 주문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보면서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은 앞으로 힘들겠군.’이라고 마치 남 일처럼 생각했는데, 그 세대가 나일 줄이야.



1. Untact 현상


요즘 일상에서 직원을 직접 대면하지 않는 서비스 형태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무인 주문기는 요즘 흔하다. 아마 대학교 학식은 거의 다 무인 주문기로 운영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아침 출근길에 가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마신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학교 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사이렌오더’로 주문을 한다. 사용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주 편하다. 매장에서 주문하고 기다릴 필요 없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주문한 거 휙~ 가지고 나가면 그만이다. 직원과 대화할 필요는 없다.

또 어떤 게 있을까? 최근에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이 시애틀에 연 무인 편의점도 이런 서비스의 형태이다. 직원과 대화 없이 물건을 고르고 장바구니에 담아서 들고 나가기만 하면 된다. 한국도 최근에 잠실 롯데타워와 조선호텔에 무인 편의점을 열었다.


이런 서비스를 마케팅 분야에서는 ‘없다, 아니다’를 뜻하는 ‘un’과 ‘접촉하다’의 ‘contact’를 합성해서 ‘untact’라고 부른다. 즉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비대면 형태의 서비스를 말한다.

이 현상은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소비 트렌드 중 하나인데, 언어와 의사소통을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 단어가 참 흥미롭다. 왜냐하면 언어학자인 야콥슨에 따르면 ‘contact’ 즉 접촉은 의사소통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인데, 그 요소 없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현상이 우리 시대, 특히 20대~30대 젊은 세대들의 변화된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현상이 등장한 배경은 뭘까?



2. Untact는 어떻게 등장했나?


아마존이 연 무인 편의점 이야기를 했는데, 아마존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이다. 이런 온라인 쇼핑몰이 오프라인에서도 무인 매장을 열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온라인 공간의 경험이 오프라인 공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해진 첫 번째 이유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성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1)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의 성장


‘디지털 네이티브’, 다시 말해 디지털 공간에서 탄생했다는 말인데,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디지털 기기와 온라인 접속과 같은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세대를 의미한다.  

아마도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사람이라면 ‘접속’이라는 한국 영화가 생소할 것이다. 한석규와 전도연이 주연한 1997년 영화이다.(아마 20대 중에는 한석규와 전도연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은 PC 통신으로 남녀 주인공이 연애하는 이야기이다. 당시 이 영화의 홍보 문구 중 하나가 ‘A New Age Love Story’였다. 이 영화는 PC통신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 매체가 등장했고 이런 매체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1997년은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의 대학가 풍경을 회상해 보면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1997년만 해도 인터넷은 일상화된 서비스는 아니었다. 내가 대학교 입학할 당시에는 인터넷 접수라는 개념이 없었다. 만약 지방에서 서울 지역 대학 입학 원서를 접수하려면 정해진 날짜에 부산에 있는 큰 체육관에 모여서 접수를 했었다. 이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내 고향 부산의 대학교에 지원했던 이유 중 하나가 체육관 접수가 귀찮아서 안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때는 학교 컴퓨터실에 학과별로 정해진 날짜에 모여서 수강신청을 했었다. 컴퓨터는 단지 내가 신청한 과목을 입력만 하는 용도에 불과했다.


역시 이것을 똑똑히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우리 과와 함께 전산실에서 수강신청을 했던 과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무용학과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즘처럼 집에서, 학교에서, PC방에서 각자 수강신청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피 튀기는 경쟁을 하는 그런 시스템은 아니었다.

내가 군대 갈 무렵인 1998년도에 학교 앞에 PC방이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PC방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1998년은 리니지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접속 방식의 게임이 하나, 둘 출시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도 대략 그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99년에 한국은 IT 창업 붐이 불면서 엄청나게 많은 포털 서비스, 인터넷 커뮤니티, 메신저 서비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내가 군대에서 딴 자격증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태권도 단증이고 하나는 인터넷 정보 검색사이다. 인터넷 정보 검색하는 데 무슨 자격증씩이나 필요할까? 실제로 이거 지금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는 자격증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은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그런 자격증도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을 거다.

내가 군대에서 전역한 2000년 이후에는 학교도 많이 바뀌어 있었다. 수강신청도 정해진 날짜에 홈페이지에서 하고 다음 카페 같은 공간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요즘으로 치면 페이스북하고 비슷한 싸이월드 같은 SNS 서비스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가 바로 2000년대 초반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20년이라는 시간과 대학교 입학 후 몇 년의 시간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살면서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20대는 디지털 환경이 이미 대중화되고 보편화되었을 때 태어나서 이런 환경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한 말 그대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이다.

즉 디지털 네이티브는 어렸을 때부터 인터넷과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물리적 접촉 없는 의사소통 방식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세대다. 그런 세대가 성인이 되었으니 이들에게 이미 익숙한 온라인 공간의 경험을 오프라인으로 가져 와서 서비스에 활용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2) 스마트폰의 대중화


20대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동시에 스마트폰 세대이기도 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2017년을 기준으로 한국 10대와 20대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각각 96.2%, 99.8%라고 하니, 이 정도면 10대, 20대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2015년 조사에 따르면 한국 20대는 수면 시간을 제외한 하루 평균 3시간 44분을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수면 시간을 7시간 정도로 치고 그 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하루 일과의 20%가 넘는 시간을 스마트폰에 할애하는 셈이다.


스마트폰 알람으로 눈을 뜨고, 기사 검색이나 SNS 확인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유튜브 시청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그리고 커피숍에 가서 앞에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도 스마트폰으로 카톡과 SNS를 확인하는 것도 흔히 관찰할 수 있다.

결국 스마트폰 사용 시간 하루 20%도 내가 보기에는 낮게 나온 수치다. 뭔가 의미가 있고 적극적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활동은 아니더라도 손에 들고 있으면서 잠깐잠깐 검색하고 확인하고 쳐다보는 시간으로 따지면 자는 시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스마트폰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다.

언택트가 일상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성장과 함께 스마트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의 분리가 명확했다. 즉 PC 시절에는 온라인 공간에 접속한다는 것이 PC가 설치된 별도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곧 PC가 있는 장소에 가기 전까지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생활하는 거였고, PC의 전원을 켜고 나서야 온라인 공간에 접속하는 거였다. 이때만 해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완전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PC와 다르게 ‘이동성’을 바탕으로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 공간에 접속할 수 있게끔 만든다. 스마트폰 사용자 중에서 스마트폰을 사용 안 할 때 전원을 꺼 두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 공간에 접속해 있는 상태가 되었다. 스마트폰은 온라인 공간 접근성을 개선하는 수준을 넘어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제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을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어진 셈이다.

이렇게 경계가 무너지는 현상이 어떤 의미가 있냐면, 온라인 공간에서 상품 리뷰나 구매 후기 등의 정보를 검색한 후에 상품을 구매하던 방식이 오프라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곧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직원의 도움이 굳이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요즘 이니스프리 매장에 들어가면 구매한 물건을 담는 바구니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혼자 볼게요’ 바구니이고, 다른 하나는 ‘도움이 필요해요’ 바구니이다. ‘혼자 볼게요’ 바구니를 들면 직원의 설명 없이 혼자서 쇼핑을 할 수 있다. 직원의 사무적인 친절이 때로는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시스템인데, 이것 역시 직원 없이도 상품 관련 정보를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검색해 볼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와인을 가끔 마시는데 사실 어떤 와인이 좋은 와인인지는 잘 모른다. 예전에는 직원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얼마 전에 와인 정보 찾아주는 앱을 설치했다. 와인 라벨만 스마트폰의 카메라로 찍으면 그 와인에 대한 정보나 사람들의 평가, 점수 같은 게 바로 나온다. 직원이 설명해 주는 정보보다 이게 더 자세하고 믿을 만하다.

이처럼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오프라인 공간과 온라인 공간의 구분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언제나 실시간으로 온라인 공간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에는 카메라를 포함해서 GPS 센서가 장착되어 있다. 이런 센서를 통해 사용자의 상황 정보와 온라인 서버는 실시간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스타벅스의 사이렌 오더뿐만 아니라 택시 잡아주는 앱, 배달 앱, 그리고 길찾기 앱이 바로 GPS를 사용한 서비스의 예이다.

그리고 이런 서비스는 단순히 사용자의 위치나 상황을 파악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용 패턴을 지속적으로 학습해 나감에 따라 지능적으로 맞춤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더욱 편리하다. 이런 서비스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제안해 주기 때문이다.

온라인 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스마트폰의 카메라나 GPS를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 이 개념이 어렵다면 전세계적인 열풍이 잠깐이나마 불었던 ‘포켓몬고’ 게임을 떠올리면 된다.


그 게임에서 당신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카메라를 켜고 포켓몬을 잡고 있는 공간은 온라인인가? 오프라인인가? 어쩌면 스마트폰을 소유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혼성 공간에 가깝다.



3. Untact 시대 의사소통의 풍경


1) 입과 귀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Untact는 주로 상거래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소비 트렌드 중 하나지만, 언어와 의사소통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 현상이 ‘말하기’와 ‘대화’의 방식을 바꿔 놓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말하기와 대화란 무엇인가? 우선 화자와 청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입으로 말을 하면 귀로 음성을 듣고 이해하면서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 편의 서비스를 생각해 본다면?

스마트폰과 이런 종류의 앱들이 일상화되기 전에는 주문이나 배달이나 길찾기가 입과 귀로 음성을 주고받는 행위였다. 그런데 배달앱이나 길찾기앱은 어떤가? 일단 화자와 청자의 개념이 정확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화자와 청자 대신 사용자와 정보가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또한 입은 필요가 없다. 단지 손가락으로 문자를 입력하거나 정보를 터치해서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또 음성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화된 정보를 보고 읽으면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화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은 사용자가 화면의 시각화된 정보를 보고 읽은 후에 정보를 터치하는 방식이다. 입과 귀가 아니라 손가락과 눈으로 대화를 하는 셈이다.

화면을 사이에 두고 입과 귀가 아니라 손가락과 눈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하면 ‘카톡 대화’를 빼놓을 수 없다. 혹시 한국 사람들 중에 카톡앱 안 깔려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카톡 대화는 어떤가? 이것도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은 입과 귀가 아니라 손가락과 눈이다.

‘띵작’이나 ‘댕댕이’, ‘롬곡옾눞’ 같은 신조어들이 왜 나타나게 되었을까? 바로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가 눈으로 읽고 이해하는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말장난이다. 이런 신조어들은 소리가 아니라 모양을 봐야 무슨 의미인지 유추를 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을 한글 파괴라고도 보기도 하지만, 말하기와 대화의 시각화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2) 고백도 카톡으로?


그런데 카톡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고 해서 카톡 대화가 기존의 음성 대화를 완전히 대체할까?

혹시 카톡으로 고백을 하거나 고백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사실 내가 20대, 30대의 언어 사용 관습을 정확하게는 잘 몰라서 추측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고백이라는 게 직접 만나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긴장하고 떨리는 와중에도 눈빛이 뜨거운 만큼 내 감정이 진심이라는 걸 보여줘도 성공할까 말까인 어려운 미션인데, 이걸 문자나 이모티콘으로 해서 성공할 수가 있을까?

아, 물론 성공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알 만큼 이미 충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나 가능하다. 스마트폰이 없던 피처폰 시절에도 가끔 문자 메시지로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인터넷에 보면 그런 문자 고백에 어이없다는 글들이 종종 있었다.

만약에 카톡이 일상적인 대화를 완전히 대체하는 거라면 카톡이나 문자로 고백을 하는 거나 직접 대화하면서 고백하는 거나 다르지 않은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그건 상황의 차이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는 카톡 대화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가 있겠지만, 고백이라는 건 화자와 청자의 관계도 특별하고, 메시지가 가지고 있는 부담이나 중요도의 정도도 일상적인 대화와 차이가 있는 만큼 카톡으로 고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몇 가지 상황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일단 기본 전제는 상대방과 대면 대화가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이 전제를 염두에 두고 사과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친한 친구한테서 책을 빌렸는데, 그걸 어쩌다가 잃어버렸다.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사과를 한다면 직접 만나서 말을 할까? 아니면 카톡으로 할까? 아마도 개인 차이는 있겠지만 친한 친구라면 이 정도는 카톡으로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친한 친구가 아니라 평소에 친분이 있는 학과 교수님한테서 빌린 책을 잃어버린 경우라면? 아마 이 경우는 카톡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여길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가? 이런 차이가 생긴 이유는 대화 상대방, 전달할 내용의 부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카톡과 SMS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스마트폰 전에 피처폰 시절에는 문자로도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카톡을 사용하면서부터는 어떻게 되었는가? 이제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문자로 주고받는 경우는 없다. 이제 친구와의 일상적 대화는 거의 카톡으로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문자 메시지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SMS는 스팸을 포함해서 각종 통신사 문자나 학교, 학과 사무실 같은 곳에서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친교적인 기능은 축소되고 정보 전달의 기능만 남게 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다고 해서 기존의 매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는다. 기존 매체와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매체들은 역할이 조정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비유를 하자면 매체끼리 거대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생태계 안에 새로운 매체가 들어오면 매체들끼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 영역을 새롭게 설정한다.

결국 카톡 대화와 대면 대화의 관계도 그렇게 봐야 한다. 직접 대면해서 하는 대화가 적절한 상황과 메시지가 있을 것이고, 카톡 대화로도 충분한 상황과 메시지가 있다. 그게 규범처럼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고백의 경우처럼 상황에 맞는 매체 사용의 적절성에 대해서는 언어 공동체 내에서 암묵적인 합의가 형성된다.



3) 인사도 없이


카톡 대화에서는 대면 대화나 전화 통화와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평소에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과 주고받은 카톡 대화를 조금만 관찰해 보면 쉽게 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대면 대화나 전화 통화는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고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용건 끝났다고 다짜고짜 대화를 끝내는 경우도 없다. 대면 대화나 전화 통화는 보통 ‘인사’라고 하는 대화의 시작과 종결 신호가 나타난다.


그런데 카톡 대화에서 인사로 시작해서 인사로 대화를 끝내는 경우는 단톡방에서 공지를 하거나, 처음 알게 된 사이에서 처음으로 말을 건네는 경우, 아니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다가 오랜만에 연락을 하는 경우에서만 나타난다. 가끔 한동안 연락을 한 하던 후배가 “형님, 잘 지내시죠?”라고 안부를 물으며 연락이 올 때가 있다. 인사로 시작하는 저런 메시지가 오면 거의 결혼 소식 같은 중요한 연락이다. 그리고 이런 연락은 대부분 “잘 지내십쇼.” 같은 끝인사로 마무리가 된다.

하지만 평소에 일상적으로 카톡을 주고받는 친구와 “안녕”이라는 말로 카톡 대화를 시작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또 대화가 끝난다고 해서 꼭 “다음에 보자” 뭐 이런 식으로 끝인사를 붙이지도 않을 것이다. 대개는 간단히 호칭만 불러 놓고서는 바로 용건만 이야기할 때가 많다. 그리고 용건 다 말하면 대화가 바로 끝나 버린다.  

일반적인 대화의 규칙으로 보자면 인사도 없이 용건만 말하는 것은 상당히 예의가 없는 행동인데, 카톡 대화에서는 그게 용납이 된다. 카톡에서는 인사를 하는 게 오히려 어색하다. 그 이유는 뭘까?


아마도 스마트폰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온라인 공간에 상시적으로 접속할 수 있는 만큼 상대방하고도 상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사는 나와 접촉이 끊어져 있던 상대방과 접촉이 시작되었다거나, 다시 접촉이 끊어진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인데 항시적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과는 굳이 이런 신호를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



4. 매체 생태계 속의 인간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생활을 편리하게 돕는 ‘도구’, 소통의 ‘수단’ 정도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우리의 의사소통 방식과 체계는 변하고 있다.

앞에서 매체들끼리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했다. 사실 사람도 이 생태계 안에 포함되어 매체와 상호작용을 한다. 결국 스마트폰은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행동 그리고 생활 전반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계이다.

마셜 맥루언이나 닐 포스트먼 같은 미디어학자들은 매체가 갖는 편향성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매체의 편향성이란 매체가 갖는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아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인식도 세상을 종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편향되게 보게 되는 위험성이 있음을 경고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으로 신문 기사를 읽는 것이 확산되면서 한 장짜리 사진과 짧은 문구들의 조합으로 기사를 전달하는 ‘카드 뉴스’와 같은 뉴스 형태가 나타난다. 이런 형태의 뉴스는 스마트폰 화면에 최적화되어 가독성이 높고, 뉴스 이해를 돕는다는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논리적이며 복잡한 내용을 담아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형태의 뉴스에 길들여지고 감성을 자극하는 간단한 사진과 짧은 문구 읽기에만 익숙해지면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길고 복잡한 진실은 우리의 눈에 들어오질 않게 된다. 세상은 이성과 감성의 두 축으로 구성되며 또 그렇게 이해되어야 하지만 매체가 우리의 의도와 관계없이 진실을 외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술의 영향으로 세상이 변하는 것,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변화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도 누군가에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소외되는 계층이 있다는 것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아무리 카카오톡의 이모티콘으로 의사 표현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모티콘보다 그 안에 담기는 진심이 중요하고, 그런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직접 만나서 살을 부대끼고 목소리도 들려줘야 할 때가 있다.

매체 생태계 속에서 변화에 굴복하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변화를 능동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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