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건드리는 인간 노동의 고유 영역과 패러다임의 이동
제가 몸담고 있는 직장도 AI를 통한 생산성 향상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챗GPT에게 질문을 던지는 수준을 넘어서야 하는 만큼, 기술적인 허들을 넘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부류도 당연히 있고요.
이들에게 독려를 가장한 경고성 메일을 작성합니다.
"기술이 변화하는 만큼 사람도, 일하는 방식도 변해야 합니다. 앞으로 도전적인 과제가 주어질 것이며, AI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이런 변화에 주도적으로 대응하는 사람만 회사에서도 살아 남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노동은 철학이나 정치 같은 고귀한 활동에서 밀려난, 생존에 묶여 있는 천한 활동이었습니다. 노동은 자유인이 아닌 노예의 영역이었습니다.
20세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구분을 다시 한번 날카롭게 짚었습니다. 아렌트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반복하는 일과,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는 일을 엄격히 구별했습니다. 전자는 먹고 자고 다시 일어나는 순환이고, 후자는 그 순환 밖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인식이 뒤집힌 것은 산업혁명 이후였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기 시작하자, 역설적으로 인간은 노동에서 존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이 창조적 본성을 실현하는 통로로 보았고, 에리히 프롬 역시 노동을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이해했습니다.
기술 환경이 달라지면서 일의 의미도 함께 달라졌습니다. 천한 속박이 인간다움의 증거로 격상되었고, 시대는 노동을 다시 썼습니다.
산업화가 깊어지면서 노동은 직업이라는 형태로 굳어졌습니다. 직업은 단순히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나를 규정하는 '자리(occupation)'가 되었습니다. 명함 한 장에 내 역할이 압축되고, 그것이 곧 나로 통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틀 안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단순한 수입의 상실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리를 잃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AI라는 기술의 파고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도 어쩌면 이 '일자리'라는 틀에서 생겨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1811년 영국 노팅엄에서 섬유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러다이트 운동은 '기계에 대한 무지와 공포'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이면이 있습니다. 러다이트들이 두려워한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 구조였습니다. 안전망도 없이 평생 쌓아온 숙련이 하룻밤 사이에 쓸모없어지는 경험이었죠.
러다이트 운동 이후에도 비슷한 불안은 1930년대 자동화, 1980년대 컴퓨터 도입, 2000년대 인터넷 확산 등으로 되풀이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이번엔 다르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일자리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일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일 자체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과거가 지금의 불안을 말끔히 씻어주지는 못합니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이 곧 안심의 근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지나온 기술 혁신들은 대체로 '어떻게 일하는가'를 바꿨습니다. 자동차는 마차꾼을 운전기사로 전환했고, 컴퓨터는 손으로 하던 회계를 스프레드시트로 옮겼습니다. 일하는 방식이 달라진 거죠.
그런데 AI가 건드리는 것은 조금 다른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를 넘어 '무엇을 사람이 해야 하는가'를 바꾸고 있습니다.
MIT와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공동 진행한 '프로젝트 아이스버그(Project Iceberg)'가 포착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AI는 직업 자체가 아니라 직업 안의 개별 업무(task)를 가져갑니다. 문서 요약, 데이터 정리, 초안 작성처럼 일을 익히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수행되던 것들이죠. 눈에 드러난 직업명 아래, 그 직업을 구성하는 세부 업무들을 들여다본 연구입니다.
눈에 보이는 해고 수치보다 훨씬 넓은 곳에서, 훨씬 조용하게 이 변화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 프로젝트가 관찰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일자리'와 '업무'는 사실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직함이 있다는 것은 특정 업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업무가 그 사람의 역할을 규정했습니다. AI는 이 둘 사이를 조용히 갈라놓기 시작했습니다.
일자리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업무가 달라지는 상황. 해고된 것도 아니고 승진한 것도 아닌데, 뭔가가 달라졌다는 느낌. 내가 하던 일을 기계가 하기 시작했다는 감각. 이런 것들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묘한 감각의 정체에 가깝죠.
이 변화는 실업률이나 GDP 같은 전통적인 지표에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숫자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다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AI가 업무를 가져가기 시작하면서 직격탄을 맞고 있는 부류가 있습니다. 신입, 인턴, 주니어 포지션입니다. 이들이 하던 자료 조사와 정리, 요약 등의 업무는 이제 숙련된 시니어가 AI에게 맡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일자리 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이 쌓이는 통로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도 기존 패러다임이 바로 사라지지 않고, 두 가지가 한동안 나란히 존재하면서 서로의 언어가 섞이지 않는 팽팽한 시기가 지속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어긋남의 시기에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혼란과 방향 상실입니다.
지금의 노동 시장이 그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직업 중심의 틀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업무 단위로 재편되는 새로운 흐름이 그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두 흐름이 겹쳐 있는 지금, 그 어긋남에서 불안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지는 것은 일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둘러싼 오래된 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 환경이 바뀔 때마다 사회는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냈습니다. 노동이 천한 예속이던 시대에서 존엄의 증거가 되기까지도, 그 전환 뒤에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완충 장치가 뒤따랐습니다. 일자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지금,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뒤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개인에게 던져진 질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방어적 태도를 넘어, '일한다는 것이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살아 남을 것이라는 문구가 법적인 리스크가 있다는 이유로, 보내려던 메일은 인사팀에서 제동을 걸었습니다.
저 문구는 저를 향한 경고로 마음 속에 담아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