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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이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나도 내 편이 되어야 합니다.

by 이제트

“민원 관련 일을 하는데요… 오늘은 유독 힘들었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걸 부모님께 말하면,

‘네가 뭐가 힘드냐’고 하실 것 같아서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더니 더 우울해졌어요.”


그녀는 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그녀는,

그 누구보다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저는 쓸모없는 사람 같아요.”
그 말은 한겨울의 바람처럼 조용히,

그러나 깊게 스며들었다.


퇴근 후에도 무력감과 불안은 이어졌다.
불면의 밤은 길었고, 불안은 몸을 조이듯 달라붙었다.


결국 병원을 찾았지만 이미 진료는 끝나 있었다.
“진료를 못 받았다는 사실보다, 거절당한 느낌이 더 컸어요.”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했다.

그 고통을 멈추고 싶었다고 했다.


응급실에서 퇴원한 지 며칠 뒤, 그녀는 다시 출근했다.
몸은 무겁고 숨은 가빴지만,

“오늘은 민원이 많지 않아서 괜찮았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틀거리면서도,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해요.
기분이 드러나는 게 싫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괴로워요.”


도움을 주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도움을 받지 못한 채 그녀는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다.


“잘하고 싶은데, 지금은 잘 안 돼요.
예전 직장 생각이 자꾸 나요.
그땐 잘 해냈던 사람이 지금은 너무 작아진 것 같아요.”


나는 물었다.

“그럴 때,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건네나요?”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또 못했네’라고요.”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럴 때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히 잘했어’라고

말해주는 것도 필요해요.
누군가가 아니라, 스스로에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하루에 하나씩 자기 자신에게 따뜻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은요... 약 먹고 아침도 챙겨 먹었어요.
그게 나름, 잘한 것 같아요.”


그 말 한마디는,

자책으로 얼룩진 마음 위에

스스로 적어낸 가장 다정한 문장이었다.


“출근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어요.
그런데 병가를 권유받고 나니까 조금은 괜찮아졌어요.”


나는 말했다.
“그건 회피가 아니라 선택이에요.
아무도 대신 내릴 수 없는 결정을,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내린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녀를 붙잡은 건 가족이었다.
“가족 얼굴이 떠올라요. 그 순간, 내가 멈춰야겠구나 싶어요.”


나는 말했다.
“그건 당신이 스스로를 지켜낸 흔적이에요.
그 기억을 자꾸 떠올리고, 연습해 보는 건 어때요?
모니터 옆에 가족사진을 두는 것도 좋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해치지 않는 방법을,

조금씩 훈련해 가는 중이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녀가 말했다.
“엄마랑 정신과 진료를 같이 보기로 했어요.

입원도 생각하고 있어요.”


입원이라는 말조차 거부하던 사람이 이제 그 가능성을 입에 올렸다.
나는 그 용기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에요.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도움을 선택하는 건,

가장 강한 마음이에요.”


우리는 지역사회에서 도움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했다.
처음엔 망설이던 그녀도 이제는 말했다.
“다른 도움 받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한마디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온 것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흔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들림 앞에 무너지지 않고
스스로를 감싸 안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저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게 저를 지탱하는 이유였거든요.”


그녀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단지, 자신에게만 차가웠던 사람.


“괜찮냐고 묻는 동료에게…

처음으로 괜찮지 않다고 말해봤어요.
그 한마디가 이렇게 숨 쉬게 해 줄 줄 몰랐어요.
이제 제 편이 되어보려고,

치료받으면서 노력하려고 해요.”


도움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 순간,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속으로 울컥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 다정한 결심이 오래도록 그녀 곁을 지켜주기를.


자책으로 얼룩진 하루를 지우는 가장 따뜻한 방법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 본 글은 실제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내담자의 신원 보호를 위해 일부 정보를 변경 및 각색하였습니다. 내담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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