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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스페인 3. 마요르카 길티

먹고 자고 마시고 물놀이하고 읽고 마시고 놀고 

정재형 summer swim


스페인 어디 가냐고 물었을 때 마요르카에 간다고 하면 지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다


"야 그거 신혼여행이네(아닌데?)" "결혼해야겠네(왜??)" "결혼해?(나 결혼해??????)"


마요르카가 벌써 신행지 프로토타입까진 아닌데. 아니지. 이거 신행 아닌데? 나도 혼란하다. 일단 허허 웃으며 뭉개고 본다. 신혼 여행과 오래된 커플의 여행, 양쪽의 본질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예산?)는 아직 전자를 겪어보지 못해 모를 일이나, 이번 여행의 이유는 나와 내 연인 각자의 인생에서 만난 귀한 여백을 채우는 방식이 잘 맞아떨어진 까닭이다. 여행을 통해 관계가 더 끈끈해질 수 있다면 그건 덤이라는 널널한 마음으로. 



늦은 오후 공항에 내려 렌트카를 받고 마켓에 들러 장을 거하게 본 뒤 세상 모르게 뻗어버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전일의 나를 원망한다. 숙소는 해변이 맑고 조용하면서 동네 마실만 나가도 그렇게 예쁘다는 섬 남쪽 구석이다. 최대 4팀만 묵을 수 있는 독채형의 아파트로 고요하고 차분하다. 첫 아침. 눈을 뜨니 창 밖에서는 옆 숙소의 아가가 옹알대며 풀사이드를 서성대고 있다. 아! 과속중이던 일상이 아니다. 비로소 나는 쉬러 왔구나.


사람 미치게 만드는 딱 그 물 색을 보라 

굳이 멀리 어딘가를 나갈 필요가 없다. 몇십미터만 걸으면 근사한 풍광의 해변이 나온다. 지중해에 속한 스페인의 발레아레스해는 물이 특히나 맑고 청아하다. 쌩얼에 대충 원피스만 걸터입고 담배와 물을 챙겨 산책을 나선다. 좋은 풍경을 보면 친구와 가족이 생각난다. 엄마에게는 바다 사진을, 두 개피의 담배를 들고 사진을 찍어 흡연자 친구에게 보낸다. 너 대신 내가 피워준다. 보고싶다 자샤들아.



숙소로 돌아와 연인(어제 운전하느라 혼과 이틀치 에너지을 쏙 뺀)과 약속한대로 풀사이드 일광욕을 즐긴다. 말라가 공항에서 급하게 구매한 탱커레이진 세비야 에디션을 열어 홀짝댄다. 쥬니퍼베리에 앞서 오렌지향이 흠뻑 올라오는 풍미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런 일광욕은 5년 전 절친여행때 후아힌에서가 마지막이었는데, 코시국이 오래되긴 오래됐구나(홀짝이며) 하며 살이 타던말던 쨍쨍한 볕을 있는 그대로 즐긴다. 



5일동안 3차 해수욕 뿌시기. 1일 1해수욕의 꿈으로 왔지만 이정도도 충분하다. 근처 슈퍼에서 시원하게 달궈진 맥주를(까르푸보다 한 2배는 비싸지만 괜찮아 시원하니까) 사다 마시고, 바다에 들어갔다 나와 마시고 물놀이하고 책읽고 물놀이 끝없는 쾌락의 반복이다. 5년만에 진하게 들이마시는 여름 휴가의 맛이다. 코로나때문에 잊혀진 내 자유의 맛 돌려내.



5월의 마요르카는 성수기로 들어가는 인트로라고 하지만 듣던것보다는 훨씬 더 덥고(평균 30도였음. 봄날씨라고 한 블로거 나와. 괜히 무겁게 긴팔 가져갔잖나) 바닷물은 시원하기보다 살짝 차갑다. 백사장에서 몸을 있는대로 달군 뒤 바닷물에 들어가면 마치 한증막에서 지지고 냉탕에 들어가듯 짜릿한 그 맛.


사람들은 배가 나오건 엉덩이가 쳐지건 팔다리가 두껍던 말건 비키니를 내리고 웃통을 벗고 태닝을 즐긴다. 동양인이라고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없다. 시선이 자유로우니 맥주 과음에 배가 뽈록해진 나도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남의 시선보다 내 즐거움과 감각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내 인생은 누군가와 함께한 나의 기억, 혹은 나 자신의 삶의 기록이다. 이 시간을 더 깊게, 온전하게 즐겨야겠다.



징하게 먹고 마시고 물놀이하고 낮잠자고 또 벌컥대고. 길티 덩어리의 놀자판 휴양 여행에 지쳤을 소중한 간과 거지 체력을 회복하고자 근처 국립공원에 들러 트래킹을 했다. 낯선 곳에 오면 감각을 더 날카롭게, 진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 더 깊게 귀기울이게 된다. 간은 길티인 내게 좀 걸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찔린다.


4년 전 러닝 크루에서 만난 우리는 왕복 4키로 정도의 산 트래킹은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다. 마요르카에서 트래킹을 한 사람들은 많이 없는지 네이버에는 리뷰가 거의 없길래 구글링으로 어찌저찌 찾아간 예반트 국립공원(Parc Natural de la Península de Llevant). 비슷하게 말하자면 제주 오름같은 구릉이 쭉 이어져 산처럼 이어진 구조인데 정상에서 보는 발레아레스해의 전경이 근사하다. 해변에서의 태닝도 좋지만 땀흘리며 자연스럽게 그을리는 태닝도 좋다. 점프 수트가 더워 윗도리를 내리고 허리에 묶어 다소 몸짱 아줌마같은 난해한 패션이 됐는데도 이상하게 보는 이들도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은 최상의 자유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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