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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배 Jul 17. 2019

사람, 장소, 환대

여성, 그리고 전교조, 2017. 9. 20.

“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도덕적 공동체-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이라는 건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문학과 지성사, 31쪽)
 

우리가 어떤 사회(공동체)의 한 사람의 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시말해 자연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그 사회(구성원들)의 ‘환대’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즉 ‘상대방이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해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그 사회 안에서 자기의 이름과 자신의 자리/장소를 가질 수 있을 때, 그것을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  

로마 시대의 노예나 남북 전쟁 전 미국 남부 지역의 노예들은 환대 받지 못했으며, 사회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장소를 가지지 못했다. 올란도 패터슨은 『노예와 사회적 죽음』이란 책에서 노예를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정의하며, 그들은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사회’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라 설명했다.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사회’ 안에 들어와 있지만, 다른 사람들 눈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 ‘현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종의 투명 인간 취급을 받은 셈이다. 그러니까 그 사회의 성원으로 환대받지 못한, 예외 지대에 존재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엔 예외 지대에 존재하는 이들이 있다. 법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그 사회의 다른 성원들이 누리는 자기의 자리/장소를 누리지 못하고 환대 받지 못한 체 낙인 찍혀 배제당하는 특정 집단이나 소수자들이 존재한다. 성소자들이 그러하고, 이주 노동자들이 그러하고, 경제적 약자와 장애인들이 그러하다. 사회의 지배 권력과 계층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방해가 되거나,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낙인 찍어 어김없이 예외 지대로 내몰았고, 적대적 타자 취급을 했다. 민주노총이나 전교조, 성소수자 집단이 겪어 온 탄압과 배제들이 그러하다. 최근의 위례별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겪고 있는 일, 그리고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과 관련해 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이 겪는 일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낙인 찍어 배재하려는 배타적인 지배 세력 또는 주류 세력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예외 지대로 내모는 것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먼저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데서 출발한다. 모욕당하는 집단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이런 모욕이 일상화되면, 그때부터 법적으로 이 집단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일이 가능해진다....모욕은 존엄을 공격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무너뜨린다.” ( 같은 책, 103쪽)

“누가 나를 돼지라고 부른다해서 내가 정말 돼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이라고 점잖게 응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욕을 이처럼 감정의 표현 내지 잘못된 재현으로 이해할 때, 말과 몸짓이 지니는 수행적 차원은 간과되고 만다. 나를 돼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한 명 뿐이라면 나는 그를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둘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마침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나를 돼지라고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실제로 돼지가 된다.( 따돌림받는 아이들이 숱하게 겪는 일이다.)” (같은 책, 108쪽)

지난 10년 간 이명박근혜 정권이 전교조에 써 먹은 수법이 이러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끊임없이, 공공연히 모욕했다.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사회경제적 열악한 환경 때문에 각자도생 하기도 바쁘다보니 다른 사회구성원들도 이런 공공연한 모욕에 침묵으로 방관했다.  기-승-전-전교조 까기가 무슨 유행이나 된 것처럼 모욕이 일상화되어 왔다. 마치 두더쥐 잡기 게임의 두더쥐처럼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걸 봐야 했던 10년이다. 이런 지나치고 과도한, 왜곡된 모욕과 조롱을 페이스북에서도 나는 꽤 자주 보고 경험했다.

전교조는 잘못 한 게 하나도 없고 전교조에 대한 비판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전교조가 그동안 겪어 온 탄압의 본질이 어디에 있고, 저들이 그동안 민주노총이나 전교조와 같은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과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민주노총이나 전교조에 비정상적인 낙인을 찍어서 ‘배제’와 ‘조건부 통합’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다. 부당한 규약 시정 요구를 조건으로 전교조를 법외 노조로 내몬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최근 위례별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저들은 그렇게 했다. ‘수간’이니 ‘항문 성교’니 ‘임신과 낙태 조장’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새빨간 거짓말과 혐오 발언으로 낙인을 찍어 공공연히 모욕했다. 배제와 낙인, 주류 지배 세력이 적대적 타자들이라고 생각하는 특정 범주의 사람들에게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이다. 공공연한 모욕을 통해 사회 안 그들의 자리/장소를 빼앗아 사회 바깥으로, 예외 지대로 내모는 게 그들의 주된 수법이다. 

이렇듯 일련의 여험 관련 일들을 보노라면, 대한민국에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조건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멀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글쓴이의 마지막 맺음말에 더 공감하게 된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같은 책, 294쪽)
 

전교조에 대한 사회적 환대 역시 그렇다. 여성만큼이나 멀고 먼 길이다. 전교조 출신이 진보 교육감이 되었어도, 장관이 되고 국회 의원이 되었어도, 6만여 조합원을 거느리는 거대 노조가 되었어도, 우리 사회와 학교에서 전교조에 대한 시선과 대우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듯 전교조 역시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을 온전히 누리는 합법적 노조로서 ‘환대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 그리고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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