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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곤 Oct 04. 2024

열네 번째 생각정리

정형화의 아름다움

 전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때면 우울과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했었다. 이는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전과는 달라진 게 있다면 보다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그저 나보다 더 밝은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의 밝음에 내가 짓눌려 우울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이런 이유로 우울을 느꼈다기엔 조금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어둡거나 나만큼 어두운 사람이 없기에 모두 나보다 밝은 사람들인데,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우울을 겪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가 호감이 생긴 사람을 만났을 때만 스트레스와 우울을 느낀 건지 생각을 해봤는데, 이는 내 생활 습관과 관련된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굉장히 정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다. 한 번 무언가를 결정하면 잘 바꾸려고 하지 않고 새로움을 찾으려고도 잘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나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정형화에서 찾는다. 혼란, 혼돈, 새로움이라는 가치가 아닌 유기적으로 모든 게 맞물려 돌아가는 예측 하의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렇기에 내 삶에는 루틴이 있고, 모든 것을 예측 하에 두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호감을 느낀 사람들은 대체로 새로움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에게 없는 부분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끌리는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매번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고, 굉장히 변칙적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내 삶에 들어오게 되면 항상 나의 일상에 지장을 준다. 내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나는 그걸 표현하지 않기에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내 삶의 범위에 들어올 때면 항상 내가 이미 세워둔 일정들을 밟고 들어오게 된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럴 거란 것을 알고 있기에, 일정을 촘촘하게 세워두진 않아 그들이 들어올 부분은 많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예측일 뿐이고, 그들은 내가 생각한 대로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변칙적인 사람이 내 일상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내 정형화된 삶이 더 이상 정형화되지 않음에 스트레스와 우울을 느끼게 된다. 그 사람을 알 수 없고, 그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그런 스트레스를 없애고자 그 사람을 정형화시키려고 하고, 그 방법 중 하나로 고정된 관계를 택한다. 물론 그 사람이 싫은데 정형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만 택하는 방법이다. 내가 호감이 있는 상대에게 예측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 그것이 나의 내면적인 연애의 형태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상대를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정형화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거기에 좌절을 느끼고 우울을 느끼게 된다.
 
 이런 우울과 스트레스를 느끼다 보면 나는 모 아니면 도의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을 계속해서 내 인생의 한 부분으로 정형화하려고 노력하거나, 정형화되지 못할 거면 아예 내 인생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의 이유는 이렇다. 내 삶에 정형화되지 못하면, 예를 들면 다른 사람에게 가게 되면, 상실의 고통과 함께 더 예측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나도 아무런 근거 없이 상대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호감의 신호를 받고, 상대가 나를 피하지 않음과 시간을 오래 보낸다는 것을 인지하면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관계를 유지한 상대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리게 되면 그동안의 내 예측 신호들이 전부 틀렸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나는 상실의 고통과 함께 내가 추구했던 예측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내 정신적 측면에 엄청난 타격을 주기에 아예 내 인생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했어도, 그런 결말을 마주하면 엄청난 타격이 올 것이기에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이 들면, 답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내 판단이 맞았는지, 내 판단이 틀렸는지, 얼마나 틀렸는지, 정답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런 스트레스와 우울을 견디기 힘들 즈음에 내가 옳았는지 틀렸는지를 내 마음을 털어놓음으로써 확인한다. 내 해답이 맞았다면 정형화되는 것이고, 내 해답이 틀렸다면 내 삶에서 내보내는 것으로 말이다. 나의 관계는 항상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 열어보기 전까진 모른다는 점이 말이다. 나는 내 풀이를 항상 신뢰하지 않기에 열어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 ‘좋아한다’는 고백이 아닌 ‘너의 마음을 잘 모르겠어서 내가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고백을 통해 마음을 확인하는 방식은 굉장히 이기적인 방식이다. 결국에는 내가 힘들다는 말을 통해 상대에게 부담과 미안함을 주는 것이니 말이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한다고 하지만, 그동안 내 내면에 쌓여있는 마음들을 한 번에 마주하게 된 상대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나와는 지금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을 마주한 상대의 표정이 그려진다. 그 표정을 생각할 때면 극심한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나의 내면에는 다른 면도 공존한다. 내가 그동안 상대를 배려한 마음을 상대는 알고 있을까. 내가 아무리 배려해도 어차피 모를 텐데, 내가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그런 것들을 어차피 내가 말을 안 해서 모를 텐데,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게 과연 나에게 있어서 좋은 행동일까 하는 마음이 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면 더는 미안할 필요도 없고, 정말로 모른다면 이런 내 생각들은 불필요한 생각이었던 거고, 알고 있으면 나에게도 알려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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