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끈 - 믿음

by 늘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의 이름을 우리는 믿음이라 부른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끈은 우리를 하나로 묶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에 덩그러니 떨어뜨리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의 표정에서 이 믿음의 끈들이 약해짐과, 아슬아슬한 떨림을 느낀다.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를 걷는 광대처럼,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듯 위태롭다.


SNS에 올라온 한 장의 사진도 우리는 의심한다.

필터가 적용되었는지, 각도는 어떻게 잡았는지, 보정은 얼마나 했는지.

온라인에서 만나는 모든 정보는 진위 여부를 확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댓글 하나, 좋아요 하나도 진심인지 의심스럽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이 보내는 메시지조차 읽씹의 의미를 분석하고,

이모티콘의 개수로 감정을 측정하려 든다.


이런 현실에서 점점 확실한 증거만을 요구하게 된다.

스크린샷, 녹음파일, 명확한 기록.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발달할수록 조작도 쉬워졌다.

딥페이크 영상, 생성형 AI로 만든 글,

가짜 리뷰들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매번 믿음을 선택해야 하는 피로감에 빠져든다.


이처럼 복잡해진 현실 속에서 믿음의 연결은 입자와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과 닮았다.

원자와 원자 사이의 인력이 약해지면 분자의 사슬은 풀려버린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은 오해 하나, 순간적인 의심 하나로도 쉽게 금이 가고 부서진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관계는 더욱 미세한 균열을 보인다.

원자들이 인력이 끊어지면, 물질의 형태가 흐트러지듯,

믿음이 사라진 사회는 구성원 개개인의 삶마저도 파괴해 버린다.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말하 듯, 상대방의 마음을 정확하게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인의 행동과 의도를 완벽하게 측정하고 분석할 수 없다는 이 불확정성은,

인간 관계를 본질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내일과 예측 불가능한 타인 앞에서 불안을 느끼고 의심한다.


측정할 수 없다고 해서 대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찰자의 인식이, 대상의 상태를 바꾸기도 한다.

믿음은 타인을 마음을 담아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타인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믿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실존적 선택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을 때,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불안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음을 말했다.

'불안(Angst)'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두려움과 달리,

존재 자체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근본적인 감정이지만,

그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라고도 말했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세계-내-존재'로서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 던져져 있다.

믿음은 바로 그러한 용기의 표현이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와 타인을 향해 발을 내딛는 첫 걸음이 믿음이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믿음을

'객관적 불확실성 위에서 무한한 열정으로 진리를 붙잡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미 확실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다.

믿음은 언제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약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불안'과 '절망'을 넘어서는 '믿음의 도약'이야말로,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굳이 믿음을 선택한다는 것의 본질이다.

믿음은 그 자체로 삶을 긍정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불안해한다.

불신과 의심이 깊어질수록 서로의 행동을 감시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믿음은 과거의 확실한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닌,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용기 내어 시작해야 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무한한 책임을 이야기했다.

그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윤리적 요청을 한다고 했다.

타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 이해 불가능성 때문에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가 늦은 답장을 했을 때, 바로 섭섭함이나 의심을 품기보다는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 수 있다고 한번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

직장에서 동료가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일 때, 성급한 판단 대신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한번쯤 물어보는 작은 용기를 내 보는 것은 어떨까.

SNS에서 누군가의 글에 댓글을 달 때, 비판보다는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하고, 나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그런 관점도 있군요'라고 인정하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직접적인 접촉 없이도 서로를 돌볼 수 있음을 배웠다.

마스크를 쓴 채 주고받은 눈인사,

비대면으로 전달된 안부,

배달 기사에게 건넨 감사 인사.

이런 작은 믿음들이 모여 사회가 버텨냈다.


지역 카페에서 신용거래를 하는 단골손님,

중고거래에서 직거래를 선택하는 사람들,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하는 후원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작은 믿음으로 실천으로 옮겼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에게 먼저 인사해 보자.

카페에서 직원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한마디 건네보자.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할 때 가벼운 미소라도 함께 건네보자.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모이면 사회 전체의 신뢰가 조금씩 높아지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먼저 믿음을 건네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자체가 목적이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믿음의 결이 흐릿해질수록 우리 삶은 피폐해진다.

피폐함은 불안과 긴장에서 비롯된다.

지속되는 긴장은 우리 삶을 마모시키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상태로 내몬다.


작은 믿음부터 다시 이어야 한다.

불확실하고 희미한 믿음이지만, 작은 믿음들이 이어지고 겹쳐진다면, 강력한 결맞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빛의 파동이 결맞음을 이루어 레이저와 같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듯,

작은 믿음들이 공명한다면, 더 단단하고 강력한 사회적 신뢰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 하나의 작은 믿음이지만, 모이고 모여서 결맞음을 이룬다면,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에너지가 되리라고 믿는다.


결국 우리가 삶에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이다.

타인의 진심을 정확히 알 수 없더라도 그 마음을 믿는다.

믿음은 완전한 이해나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벽한 증명과 이해가 불가능하기에 믿음을 선택한다.


믿음에도 실패는 있다.

때로는 배신당할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불확정성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믿음으로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어둡고 불확실한 공간 속에서 외롭게 표류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믿음의 끈에 올라 걷는 일이다.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관계의 믿음이다.


서로를 믿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사회가 삭막해지고 긴장과 의심이 팽배할수록,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을 지탱하기에 신뢰는 힘은 약한 듯 하지만, 가장 강력하다.

그 믿음이 다시 살아날 때, 우리의 삶은 결맞은 파동처럼 서로를 향해 강력하게 공명할 것임을 안다.


오늘 만나는 첫 번째 사람에게 작은 믿음을 건네본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미미한 첫걸음이기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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