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무차원의 입자들

제3화 시간 이전의 감각

by 늘람

린은 그날 밤, 시간을 처음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

창밖으로 흘러드는 달빛이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책상 위 조명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 그 찰나, 방 안의 모든 것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진도, 진동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한순간 중력에서 벗어나 허공에 띄워진 듯한, 존재의 바탕이 살짝 비틀어진 듯한 감각이었다. 의미의 부재 속에 모든 것이 붕 떠버린 느낌.

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앞에 있는 공기를 짚었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 감각에는 어떤 속성도 부여할 수 없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았다. 그저... 있었다.

무차원 입자.

그것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단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는지도 모른다. 린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항상 맴돌고 있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감각. 린이 처음으로 시간이라는 흐름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 여명의 부드러운 빛이 린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거실로 향했다. 오래된 벽시계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다른 날이었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평범한, 오래된 골동품 같은 시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초침은 멈춰 있었고, 시계판의 숫자들조차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린은 안경을 벗어 천천히 닦은 후 다시 썼다. 변함없었다. 시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저 금속과 유리로 된 물체에 불과했다.

그 순간 린은 직감했다. '시간'이란 것은, 단순히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인식과 맞물려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은 호흡과 함께 귀를 기울였다. 시계의 초침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대신 가슴 어딘가에서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미세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 진동은 뇌가 아니라 몸 전체로 들리는 '소리 이전의 리듬'이었다. 피부 아래에서 맥박처럼, 그러나 심장박동보다 더 미세하고 근원적인 진동.

그 순간, 린은 생각했다. 내가 이 진동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 이 순간은 '지금'이 아닐 수도 있었겠지.

등굣길의 공기는 차가웠다. 린의 숨은 하얀 입김이 되어 공중에 흩어졌다가 사라졌다. 그녀는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입김이 공기 중에 존재하는 찰나의 순간, 그것이 펼쳐지고 흩어지는 과정. 그 모든 단계가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학교에 도착한 린은 교실 창가에 앉아 조용히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낙엽이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며 떨어지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복도 끝에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아주 느리게, 마치 영화의 프레임을 하나하나 넘기듯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린, 안녕!"

친구 서연이 밝은 목소리로 다가왔다. 서연의 목소리에는 항상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떨림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또렷하지?" 서연이 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시간 자체가 멈췄다기보단, 내가 그 시간에 딱 맞지 않는 느낌이야. 어긋나 있어. 마치 영화를 볼 때 화면과 소리가 미세하게 안 맞는 것처럼."

서연은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린의 표정에 담긴 긴장감과 혼란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린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런데 있잖아, 린." 서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도 가끔 그래. 갑자기, 어떤 장면이 두 번 반복되는 느낌? 아니면, 내가 이미 본 걸 한 번 더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데자뷔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야. 마치 시간이 겹쳐져 있는 것처럼."

린은 놀랐다. 서연도, 접촉하고 있는 걸까? 아주 미세하게라도, 시간 이전의 감각을.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영역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5교시 수업은 물리였다. 파동의 위상과 간섭에 대한 김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칠판에 그려진 정현파 곡선은 마치 생명체처럼 규칙적으로 출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린은 그 선 위로 또 다른 곡선을 보았다. 선생님이 그리지 않은 곡선. 그것은 주기적이지 않았고, 어느 한 지점에서는 선명하게 존재했다가 다른 지점에서는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때로는 완전히 보이지 않다가도, 문득 다시 나타나곤 했다.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존재했다는 흔적만 남기고.'

그건 마치, 시간 이전에 한 번 있었던 감각의 찌꺼기 같았다. 한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희미한 잔상만 남은 기억의 조각처럼. 린은 그것을 '미완의 시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아직 생성되지 않은 시간, 그러나 이미 감각은 스쳐간 상태. 완성되지 않은 채 흔적만 남긴 순간들.

그날 수업이 끝난 뒤, 린은 천천히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교실에는 몇몇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다.

"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태윤이었다. 평소엔 거의 말을 섞지 않던 반 친구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창백해 보였고, 눈 밑에는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혹시,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태윤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우리가 매일 똑같은 24시간을 산다고 믿는 게... 이상하지 않아? 어떤 날은 끝없이 길게 느껴지고,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데..."

린은 가만히 태윤을 바라봤다. 태윤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자신과 같은 혼란을 발견했다.

"너도 느꼈구나." 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어?" 태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지금...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몰라." 린의 말에 태윤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두가 같은 시간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 각자가 조금씩 다른 시간 층을 밟고 있는 건지도 몰라."

침묵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그 침묵은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깊은 이해와도 같았다.

그날 저녁, 작은 아파트의 식탁에서 린의 가족은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엄마는 일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동생은 학교에서 배운 새로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린의 아버지는 유난히 조용했다. 그는 무심하게 저녁 신문을 넘기던 손을 문득 멈췄다. 그의 시선이 식탁 한쪽에 놓인 메모지에 고정되었다. 린이 무의식적으로 남겨둔 메모였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감각이 그것을 밀어낸다."

아버지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놀람, 두려움, 그리고 어딘가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식사를 마친 후, 서재로 향했다.

오래된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한때 그가 연구하던 논문 초안들과 수식들이 빼곡히 적힌 공책들이 담겨 있었다. 누런 종이들, 바랜 잉크의 흔적들. 그가 오래전에 포기한 꿈의 잔해들.

그 가운데 하나, 't = f(ɸ)'라고 적힌 페이지. 시간은 공백의 함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유도되는 미세한 진동. 물리학 너머의 영역에 대한 그의 젊은 날의 탐구.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린은... 그곳에 도달했구나.'

린은 밤늦도록 깨어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별들이 유난히 선명했다. 그녀는 하루를 되짚었다. 교실에서 본 두 개의 파동 곡선, 태윤의 말, 서연의 경험... 그리고 자신의 감각.

그리고 하나의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내가 보는 세계는 이제 '지금'에 있지 않다.

시간은 그녀의 감각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린의 존재가 그 표면을 흘러가며 마찰시켜야 비로소 감각될 수 있는 것. 시간은 객관적인 흐름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의 산물이었다.

린은 벽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낮에 느낀 그 진동에 다시 집중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미세한 울림.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이 멈췄다.

소리도, 움직임도, 생각조차 멈춘 듯했다. 하지만 그 멈춤 속에서 린은 또 다른 울림을 들었다. 그것은 이름 없고 방향도 없었다. 시작점도, 끝점도 없는 순수한 존재의 진동.

하지만 린은 알았다. 그 울림은 '나'를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조차 '존재하고' 있다는 것. 시간이 아직 없던 순간. 의식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그 무엇.

린은 그 울림에 귀 기울였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안녕, 시간 이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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