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편 디지털 부족주의 - 취향 기반 공동체

by 늘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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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포함된 분석과 추론은 저자의 개인적 사유에 기반한 탐구 과정이다. 언급되는 각 연구들은 다양한 한계가 존재하며, 그 정확한 해석과 의미는 관련 분야 학자들의 추가 연구가 축적되어야 명확해질 수 있다. 이 글은 '확정적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각해 볼 만한 **'흥미로운 질문들'**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택할 수 없었던 부족, 선택하는 부족

기성세대의 많은 이들에게 중학교 동창, 군대 동기, 회사 선후배는 평생 이어지는 관계였다. 매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졸업 후 수십 년이 지나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생의 주요 고비마다 서로를 찾았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 같은 고향 출신 향우회, 같은 회사 선후배 모임. 이들이 삶의 중요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그런데 이 관계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태어난 지역, 배정받은 학교, 입사한 회사, 배치된 군부대가 그들의 부족을 결정했다. 지리적 근접성과 제도적 할당이 인간관계의 기본 틀을 만들었다. 좋든 싫든 그 안에서 관계를 맺고, 의리를 지키고, 끈끈한 유대를 형성해야 했다.


반면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 중 상당수는 다른 패턴을 보인다. 인스타그램에서 같은 웹툰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디스코드에서 같은 게임을 하는 길드에 가입하며, 트위터에서 같은 아티스트를 응원하는 팬덤에 속한다. 중학교 동창과는 졸업 후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많고, 회사 동료들과는 업무적 관계만 유지하는 경우도 흔하다. 대신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매일 채팅하고, 밈을 공유하고, 팬아트를 그린다.

이들은 자신의 부족을 스스로 선택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면 되고, 더 맞는 곳을 찾으면 된다. 동시에 여러 부족에 속할 수도 있다. 지리적 근접성은 더 이상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서울에서 부산의 누군가와 같은 부족이 되고, 한국에서 뉴욕의 누군가와 매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MZ세대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부족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세대가 아닐까? 그리고 이 근본적인 차이가 기성세대와 MZ세대 사이의 상호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디지털 서식지에서 자란 세대

인류학자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인간이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가 약 150명이라고 제시했다. 그는 영장류의 신피질 크기와 사회집단 크기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침팬지의 평균 집단 크기는 약 50명, 고릴라는 10명 정도인데, 인간의 뇌 크기로 계산하면 약 150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던바의 수" 150명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공간의 제약 속에서 발생한 근사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는 상황이 다르다. 실제로는 각종 SNS 플랫폼을 통해 수백, 때로는 수천 명과 연결되기도 하며, 확장된 네트워크에서 느끼는 사회적 자극의 양상 역시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계의 ‘깊이’가 동일하게 확장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연구는, “자주 교류하고 깊은 친밀감을 유지하는 사람의 수”—즉, 소위 '코어 네트워크'는 여전히 100~200명 전후에 머무를 수 있지만,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는 약한 유대, 일시적 인연, 스쳐가는 접점의 폭이 이전보다 훨씬 넓어졌음을 보여준다.


덕분에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 세대의 ‘던바의 수’는 고정된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질과 영역에 따라 유동적으로 확장되는 개념이 되었다.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서 맺어지던 사회적 관계망이 이제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물리적 거리가 의미 없는 연결이 점점 더 실감 나게 다가온다.


기성세대는 이 150명을 주로 물리적 근접성을 통해 채웠다.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회사. 반경 몇 킬로미터 안에서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었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진 이유다.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에게는 던바의 수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150명의 정체와 분포는 달라졌다. 오프라인 관계만큼이나 실재적으로 느껴지는 온라인 소속이 생겼고, 전 세계 어디서든 취향을 공유한 ‘나만의 부족’과 안정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런 변화에 주목하며 "존재감(presence)"이라는 개념을 연구한다. 미디어 학자 매튜 롬바드(Matthew Lombard)와 테레사 디튼(Theresa Ditton)은 1997년 텔레프레즌스 이론을 통해, 충분히 몰입적인 매체에서는 매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직접 존재하는 것처럼 느낀다고 설명했다.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에게 이 텔레프레즌스는 자연스럽다. 디스코드 음성 채팅방에서 함께 게임하는 것이 PC방에서 옆자리에 앉아 게임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인스타그램 DM으로 매일 대화하는 친구가 학교에서 매일 보는 친구보다 더 가까울 수 있다.


기성세대에게 이것은 낯설다. "실제로" 만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친구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디지털 서식지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실제"의 정의가 다르다. 물리적 공간에서의 만남만이 실제가 아니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교류도 충분히 실재적이다.


취향이 만드는 정체성

기성세대의 부족은 대개 정체성을 "부여"했다. 태어난 지역이 정체성이 되고, 다닌 학교가 정체성이 되고, 근무한 회사가 정체성이 되었다. "ㅇㅇ대 출신", "ㅇㅇ회사 재직"이라는 표현이 자기소개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것은 개인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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