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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Sep 20. 2019

'하프 앤 하프'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에서

12th of '33 journal <프라하를 걸을 이유>



빛이 쏟아지는 오후, 일렁이는 가로수 그림자 사이로 걷고 걸었다. 해가 가버릴까 마음은 재촉했지만, 자꾸 멈춰 서게 했던 풍경들. 볕이 따사로워 볼이 달아오르고 식길 반복했고, 그 빛을 좇아 어디라도 갈 정복자의 심리가 피어올랐다. 그때의 나는 여행자도 현지인도 아닌 애매한 존재였다. 한 걸음 더 도시 깊숙이 다가서는 일종의 비밀 통로, 그것만으로 프라하를 걸을 이유가 충분했다.








나만의 프라하를 찾아서

프라하를 나만의 도시라 부르기엔 억지스러운 감이 있다. 동유럽의 얼굴이라 할 정도로 늘 많은 이가 사랑에 빠지는 이곳. 하지만, 모든 여행자는 욕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남들과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길 바라며 부지런히 누비다 보면 어느새 그것은 내 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도시는 걸을 때마다 달리 보였다. 눈길을 사로잡는 골목으로, 햇살이 부르는 곳으로, 그림자가 일렁이는 벽을 무작정 따라가도 막다른 길 없이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 그 인생에 빠질 때처럼 지칠 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만의 프라하는 이름 없는 뒷골목에 머물러 있는 걸까. 발소리와 그림자를 새기고 돌아온 길, 어쩌면 모든 사랑받는 도시는 다녀간 추억들 덕분에 이토록 아름다워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저마다의 골목과 추억이 모여 오늘의 프라하가 됐으리라고.







여행자와 현지인 사이로

왜 여행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다른 이들의 일상을 엿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땐 말하지 않았지만, 자주 떠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일상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만큼 평범한 것이 여행이라는 마법을 거치면 특별해진다. 그 힘을 빌려 권태를 이겨내려는 나름의 노력인 셈이다. 이따금 상상한다.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면 여행은 보다 더 흥미로워질 거라고. 무심한 노부부의 대화, 파리만 날리는 과일 가게, 북적이는 클럽과 인적이 드문 골목... 하염없이 관찰하고 싶은 것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여행은 그 가운데 반짝임을 보게 한다.

비록 투명인간은 못되지만, 걷는 일이라면 꽤나 자신이 있다. 낯선 곳에서 삶을 엿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자연스레 멀리 또, 오래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 걷기란 목적지를 정하고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는 '이동'과는 다르다. 되도록 짧은 거리라도 돌고 돌아가는 것이, 웬만하면 눈과 귀를 열고 구석구석 살피며 가는 편이 느리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무작정 걷기만 한다고 될 것은 아니다. 현지에서 친구를 사귀거나 짧은 이야기라도 나눠보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직접 살아보는 것이다. 요즘 들어 한 달 살기, 장기 여행이 떠오르는 이유도 그만큼 많은 이들이 여행지에 깊이 스며들어보길 바라는 데 있다. 여행자로 절반, 현지인으로도 절반. 치킨과 피자처럼 어디서나 '반반'은 참 매력적이다.

이번 프라하에선 에어비앤비가 현지인 생활권이었던 덕분에, 동네만 걸어 다녀도 체코인들을 듬뿍 마주할 수 있었다. 식료품점, 버스정류장, 카페,  펍, 빨래방 등을 지나며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즐겼고, 틈틈이 가게에서, 길에서 만나는 이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거기서 서울의 모습을 찾는 일도 재밌다. 이를테면, 차분한 평일과 달리 주말이 다가올수록 왠지 들뜬 얼굴과 분위기,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싶은 것들. 이따금씩 그들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마치 TV 속 인물과 눈을 마주치는듯한 순간, 여유로이 눈인사를 나누고 떠나면서 어느 때보다 '반반'이 된 것을 실감하곤 했다.








오후 세 시, 하루가 마지막 빛을 뿜어낼 때의 프라하를 기억한다. 가장 깊은 낮과 터오는 밤 사이에서 나도 여행과 일상 사이 그 어딘가에 있었다. 어느 쪽으로 한 걸음 내딛느냐에 따라 이방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어디서부터 걸어 거기까지, 무엇에 이끌렸는지는 몰라도 당시엔 모든 곳이 목적지였다.

지금도 프라하는 나만의 도시라곤 할 수 없는 곳. 그러나, 골목을 거닐었던 순간만큼은 내 것이 되었다. 아마 언제라도 다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 반짝이는 삶을 엿보고 있을 것. 차곡차곡 쌓은 걸음만큼 오래도록 거기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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