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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플리 Sep 29. 2015

당신의 인터뷰 #3 정상희

m i n i m a l  interview

i n i m a l  interview

태양이 작열하며 땅을 달구고, 아직은 낙엽지지 않은 9월의 주말이었다. 다행히 땀을 식힐 만큼 바람이 분다. 그 역시 만물을 영글게 하고 불어 드는 가을바람처럼 20대 중반의 풋내나는 보리밭을 막 지나온 길이었다. 그간의 공백이 느껴지지 않아 먼저 웃음부터 났다. 그의 말을 살짝 빌리자면 지금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조금 무딘 대화가 될 것. 미니멀 인터뷰 with 정상희







  먼저 도착해 큰 창을 보고 앉았다. 잠시 후, 문소리와 함께 기억하던 대로의 정상희가 들어온다.훤칠한 키와 그 때문인지 조금 흔들거리는 걸음걸이. 그를 소개하자면 먼저, 여자들로부터 환호 깨나 받았을 훈훈한 외모를 빼놓을 수 없다. 소위 모델 체격이라 부르는 신체조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깊게 들어가는 보조개가 매력적이다. 직업군인인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지방 이곳 저곳 다녔지만, 결국 그는 서울 사람으로 새내기 때부터 세련된 도시 남자 분위기가 풍겼더랬다. 그가 건축학 전공으로 입학했을 당시에는 영화<건축학개론> 개봉 전이이었으나 섬세하고 남성적인 건축학도 이미지는 일찍부터 존재해온바, 생각하건대 후에 정상희 역시 그 로망의 실현이었을 것이다. 필자가 막 새내기 딱지를 떼고 후배를 맞던 시절 그를 처음 만났다. 밴드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이 베이시스트는 초보였음에도 여선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는데, 그때만 해도 엉뚱하고, 허당끼 다분했던 그는 몇 번만 이야기해보면 귀한 차도남 이미지가 무참히 사그라져 안타까웠다는 후문.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그는 지나치듯 재즈밴드 에디 히긴스 트리오를 가장 좋아한다 했고 요란하지 않은 무채색 옷이 잘 어울리던 이였다. 그리고 오늘, 가볍게 가죽 클러치백을 들고 나타난 그는 여전하면서도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그렇게 반가움과 호기심에 그가 던지는 질문을 무심코 받다주다보니 인터뷰어의 본분이 깜박인다. 더 틈이 생기기 전에 대화를 시작해본다.


*요즘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이슈는 무엇인가? -진로문제. 졸업 후 취업과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공인 건축을 업으로 삼을 생각인가?-아니다. 전공을 살리지 않기로 했다. 관련 직종으로 잠시 일을 해봤는데, 역시 현실은 생각과 다르더라. 건축은 일 자체에서 삶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기꺼이 할 수 있는 분야인 것 같다.

*본인은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길래.-취미생활을 즐길 충분한 여가가 필요하다. 삶이 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 내게는 좀 힘들다.

*취미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테니스, 게임, 독서, 음악처럼 평범한 것들이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처럼 손으로 하는 일도 좋아한다. 혼자 하는 일이 많긴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하는 것도 즐긴다. 특히 여럿이 피시방에서 밤부터 해 뜰 때까지 하는 LOL(리그오브레전드)이 제맛이다.

*독서 취향은? -어릴 때부터 서양 고전, 한국 현대소설을 즐겨 읽었다. 신경숙, 은희경, 김영하 등 군 복무 중에 읽은 소설들도 많이 생각난다.

*일찍이 좋은 독서 습관을 들인 것 같다. 부모님 지도로 가능했던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 혼자있을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외롭지는 않았는지. -혼자있으면서도 좋아하는 것들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다. 지금도 외롭다는 생각은 잘 안 든다. 가족 간에 대화도 많이 한다. 특히 어머니와는 연애 상담까지 할만큼 대화가 잘 통한다.

*개방적이신가 보다. -그렇다. 이제는 가볍게 술잔도 기울일 수 있어 좋다. 부모님 두 분 다 웬만한 일은 모두 경험해보라고 힘을 실어주시는 편이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더 깊은 면이 궁금해진다. 그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를 ‘툭’ 하고 내려놓는다. 이 사회에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을 생각.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만큼 그는 어느 정도에서 선에서 후회와 갈등을 멈추고 오늘에의 최선을 택해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그의 표정에선 염려보다 기대가 더 많아 보인다. 지적인 탐구에도 꽤 열심인 그는 과연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할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릴 땐 어땠나, 부모님의 유연한 지원이 있었던 만큼, 열려있는 기회 앞에서 많은 경험을 했을 것 같다. -중학교 입학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살집 있는 외모 때문에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인데, 열 세 살 때부터 두 차례 국토종주에 참가했다. 서울을 목표로 각각 강원도 강릉과 땅끝 해남부터 걷는 일. 그동안 살이 많이 빠졌다. 마침 키까지 크면서 외모가 많이 변했고 성격도 조금씩 달라졌다. 중학교에서 친구와 결성한 밴드를 시작으로 싱어송라이터를 꿈꾸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는 모델활동을 한 적도 있다.

*모델이라니 금시초문이다. 실제 패션쇼 런웨이에 섰다는 뜻인가. -그렇다. 톱모델 송경아와 장윤주가 낸 책을 읽고 호기심이 생겨 오디션을 봤다가 덜컥 합격했다. 그때가 고2-3학년 때다. (그가 섰던 쇼는 국내의 대표적인 남성복 디자이너 우영미, 정욱준 콜렉션)

*어쩌면 일찌감치 성공했을 수도 있는데 왜 계속하지 않았는지. -글쎄, 거긴 정말 끼 넘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당시에는 고3이니 그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을 경험하고 알게 된 동시에,또 다른 삶을 동경했던 것 같다.

*건축학도? 결국, 조금 더 지적인 활동에 끌렸나 보다. -그렇다. 마침 건축학이 멋져 보이기도 했고 학교 분위기 따라 고3이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모델 일을 그만둔 데 큰 미련이 없었다.


그가 계속 모델의 길을 걸었다면 요즘 그와 또래로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모델 어벤저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잠시 아쉽다는 생각을 하던 차, 정작 당사자의 이야기는 최근까지 흘러와 있다지나간 일은 놔두고 대화의 공기를 바꿔야 할 때, 그의 컵에 아이스 커피를 한 잔 더 채운다. 얼마 전 그의 SNS를 수놓은 사진들이 떠올랐다.


*SNS를 보니 얼마 전까지 외국에 있는 것 같더라. -아예 나가 있었던 건 아니고 여행을 두 번 다녀왔다. 유럽 1개월, 남미 2개월이었는데, 그 사이 기간이 짧다 보니 계속 밖에 있는 것처럼 보여서 대체 언제 귀국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웃음) 그럼 여행 이야길 해보자. 원래 여행을 좋아하는 편인가.

-사실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집에 있는 것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낯설고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하는 게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조금씩 나이를 먹을수록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됐다. 지금은 좋아한다.

*여행의 매력이라 함은? -비일상적인 것,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 또 훌륭한 자연환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다.

*지난 여행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유럽은 친누나와 함께 갔다. 누난 나와 달리 일정을 빡빡하게 짜는 편이라 조금 애를 먹었지만, 역시 좋았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재미있는 도시가 있는 스페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어서 친구와 둘이 떠난 남미 여행은 정말 최고였다. 그땐 남자들의 여행답게 대부분 일정을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소화했는데,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뭣보다 남미의 묘미는 그 순간 그곳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느껴질 만큼 멋진 광경들을 만나는 것이다. 이곳에서도 내게는 자연의 풍경이 가장 큰 감동을 주었다. 사실 남미 국가들이 거의 가난한 국가이다 보니, 숙소나 음식 등이 쾌적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것도 충분히 감수할 만큼 매력 넘치는 곳이다. 또, 여행 중 만난 사람들도 큰 몫 했다.


단숨에 석 달의 여행 이야기를 이어내며 시종 해맑던 그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더해졌다. 역시 어디서든 인연은 가장 많은 또, 깊은 이야기를 남기는 법. 그는 이국적인 태양 아래 누군가를 만난 것이었다. 그 만남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대화에서 남미 여행의 하이라이트라는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과 이구아수 폭포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했다. 구체적인 사정을 밝히기보다는 그의 감정 이야기로 대신한다.


“나는 감정에 무딘 사람"

시작과 동시에 이를 무딘 대화라 한 것은 말했다시피 그에 의한 것. 정상희는 스스로 자신이 감정에 있어 무딘 사람이라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중간중간 감정에 관해 던진 질문들에 특히 무덤덤하게, 어찌 보면 관조적으로 답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닌 양. 그는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순간에조차 약간 둔감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 앞에서도 본의 아니게 남달리 차분함을 느꼈다. 그렇게 담담히 꺼내놓는 말 앞에서 그가 적어도 몇 번은 스스로에 대해 고민 아닌 고민을 했을거란 생각이 든다. 차분한 것을 넘어 무심해 보일 만큼 그는 편하게 말하고 있었다.특히 연애라는 주제 앞에서는 이같은 성향이 열정의 반대 즉,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기시키곤 한다.그러나 조금 전 누군가로 인해 확연히 들뜬 말투를 목격한 나는 그의 연애들이 결코 미지근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을 한다. 자기중심의 선이 존재하는 관계는 무조건적인 배려와의 비교 하에 당연히 진통을 겪지만 과한 헌신이 연애의 모범답안처럼 여겨지는 와중에도 관계란 어느 하나 판에 박히지 않는다더구나 자신의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의 연애는 그에 맡는 짝을 찾았을 때,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곤 해서, 정상희의 연애는 종종 굉장히 뜨겁거나, 끓기까지 남들보다 좀더 높은 온도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의 연애가 일정치 않은 끓는 점을 가진 것은, 아마 앞으로도 여자친구를 매번 집까지 데려다 주는 헌신적인 남자가 되진 못할 거라며 웃는 그를 꼭 나쁜 남자라고만 할 수 없듯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을 말하며 빛내는 눈빛 역시 정상희인 것도 마찬가지다.


대화는 막바지로 접어든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다는 그를 좀 더 파고들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에 둔감하다 했다.


*요즘 걱정하는 게 있다면.-음..별로 없다.(웃음) 원래 걱정을 잘 안 하는 편이다. 무슨 문제도 결국 어떻게든 될 거라 여긴다.

*속 편한 성격이다. (웃음) 살면서 큰 기우랄 게 없었기 때문일 수 있겠다.- 그런 것 같다. 오히려 걱정을 너무 안 해서 탈이다. 늘 사이좋은 부모님, 하고 싶은 일이라면 큰 제재 없이 자란 환경 등에 영향받지 않았을까 싶다.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말했듯이 무엇에든 무딘 감정에 대해선 가끔 생각을 할 것 같다. -말한 것처럼, 걱정도, 결핍도 없는 삶이 고민될 때가 있다.

*정말 결핍이 없다기보다, 결핍으로 여기지 않는 게 아닐까. 웬만해선 큰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나름 기준의 체계가 있는 건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무슨 일이든 다 이유가 있다고, 모든 일은 연관성을 띤 과정이라고 느끼곤 한다.

*그런 자신에 대해 바꾸고 싶다고도 느끼나. -그건 아니다. 나는 지금 그대로의 내가 좋다. 충분한 자존감도 있고. 감정변화의 폭이 크지 않다는 점 역시 나의 일부다.


소탈하게 타당한 자기애를 말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잔잔한 세계 속에서 더욱 온전한 그의 존재를 발견한다. 스스로 무디다고 말하는 감정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는 생각의 회로를 천천히 더듬어가며 진솔하게 답한다. 덕분에 처음에는 서툰 멜로디 같던 그것이 나에게도 점차 화음을 띠며 또렷해져 왔다. 그가 좀처럼 공개되지 않을 자신만의 정원을 유순히 열어준 덕에 그 순간만은 온전히 그를 이해했다.


그는 미니멀리즘에 부합하는 사람이다. 굳이 별난 치장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격마저 군더더기 없이, 그가 좋아한다는 다른 모든 것들과 닮았다. 하지만 그가 무디다고 말한 점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설명을 남기고 싶다. 적어도 내가 본 그는 다양한 감정을 아는 사람이었다. 성격상 그것을 일일이 분류하지 않아, 바깥으로 구현되는 감정은 단순할지라도 흐르는 생각만큼이나, 마음을 스치는 감정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주인에게 잘 어울리는 정원이었다. 무디지 않은 손길이 느껴지고 결핍 아닌 절제가 있었다. 그곳에도 계절을 따라 곧 낙엽이 질 것이다.■ (SEP, 2015)


인터뷰, 글/ 황은비(olocbol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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