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TALK
우리가 만난 것은 아직 기분 좋은 토요일 오후, 기억 속 어린 티를 벗고 제법 직장이 태가 나는 한 여자가 앉아있다. 그녀는 대학후배인 정재민, 졸업 후 왕래가 없었던 터라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반가운 동시에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기대됐다. 메시지가 온 것은 어느 저녁, 첫 업무과실로 회사에서 한바탕 일을 치른 후 우울한 가슴을 안고 보낸 문자였다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토해내듯 말한다. 그날도 사정상 일찍부터 출근해 일을 처리하고 오는 길이란다. 사회생활 4개월 차, 이제 막 발을 디딘 것이니만큼 하소연 중에도 설렘이 느껴진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나는 그녀에 대해 조금 더 알 필요가 있었다. 호구조사 하듯 프로필을 캐치했다. 정재민은 부산 출신, 대학 때 서울에 왔고 경영학을 전공했으며 지금은 금융기업 CEO의 비서다. 이 밖에 기본 이상의 클라리넷 연주실력, 약간 빠르고 활발한 말투를 지녔고, 다부진 입술과 부드러운 턱선, 검고 굵은 머리칼이 눈에 띄며, 현재 애인은 없다.
이제부터 인터뷰는 그녀에게 바통을 건넨다.
* 아무래도 요즘 가장 주의를 두고 있는 것은 직장이겠다. -그렇다. 직업 특성상 바쁘기도 하고 첫 직장이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다. 또, 정규직이지만, 수습을 떼려면 더 힘써야 할 것 같다고 느낀다.
*일은 적성에 맞는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일이 재미있어서 잘해내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 원래 누군가를 챙겨주는 일에 익숙하고 또, 좋아하는데, 주요 업무와 스케쥴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백업(지원)하는 비서직은 그런 면에서 잘 맞는다.
*그렇다면 요즘은 아무리 바빠도 즐거울 것 같다. 특히 취준생시절 보다는 훨씬.
-당연히 그렇다. 행복하다. (웃음)
*정말 축하할 일이다. 그럼 직장 외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씩 MEET UP이라는 영어회화 모임에 나간다. 여러 사람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좋은 기회다. 회화시간 후에는 다 같이 뒤풀이를 하는데 그 재미도 쏠쏠하고 자주 봐서 친해진 사람들도 생겼다. 그리고 소개팅도 빼놓을 수 없는 관심사다.
근황 토크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선수답게 우수수 이야기를 쏟아낸다. 보통 첫 직장에서 현실에 발을 담근 초년생들은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제법 ‘쩔어’ 있게 마련인데, 재미는 좀 달랐다. 그녀에게는 쩔어있는 시간이 없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조차 대수롭지 않게 그냥 다 좋다고 으쓱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분명 타고난 자기 통제력, 탁월한 스트레스 해소법 둘 중 하나는 있을 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비결이 궁금해 경쾌한 대화의 화살표를 과거로 돌려봤다.
*어릴 때 이야기를 좀 해보자.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나. -아니다. 공부는 싫어했는데, 그래도 하긴 하는 학생이었다. 엄마가 공부를 시키는 편이셔서 그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덕분에 특별히 잘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은 서울로 올 수 있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니, 친구가 많았을 것 같다. -친구 만나는 건 그때부터 좋아했다. 새로 사람을 사귀는 일도 큰 부담이 없었다. 외항사 선원인 아버지와 일찍부터 기숙사 생활을 한 오빠 덕에 집이 대체로 조용했고,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있는 시간도 많았던 것 같다.
*클라리넷을 어릴 때부터 배웠다고 하던데. 전공할 생각으로 시작했나. -아니다. 클라리넷은 피아노학원을 그만두는 대신 시작한 엄마와의 일종의 ‘딜’이었다. (웃음) 중학교 3학년까지 배웠다. 특별히 재밌었던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수 있었고 음악도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대학 음악동아리에 들어온 것이겠다. -맞다. 초등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서툰 클라리넷 실력으로도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나중에도 꼭 하리라고 다짐했다. 자드락(동아리명)은 그 실현이었고 덕분에 음악 외에도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지금도 수시로 만나는 대학친구들. 누군가가 필요할 때 서로 부담 없이 의지하는 사이, 서울에선 오래 본 걸로는 이들이 유일하기에 더 각별하다.
*공부가 지겨워 대학에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는데, 기대에 부응하던가.
-전혀.(웃음) 대학도 역시 공부의 연장, 취직의 관문일 뿐이었다. 전공으로 선택한 경영학은 경쟁률, 취업률 등 현실적인 면을 고려해 골랐기 때문에 학문적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했을뿐더러, 일단 공부하기가 싫었다. 그나마 동아리에서 탈출구를 찾았고 대학 시절 주된 추억이 됐다.
이야기를 여기까지 마쳤을 때 나는 그녀를 약간 소극적이라 생각했다. 흘러가는 대로 잘 따르는 모양은 보통 순종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기에.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분명 원천이 있을 남다른 에너지가 아직 미제로 남아있으니 속단할 수는 없었다. 재민의 삶에 흥미라 할 수 있는 부분을찾아보기로 했다. 무엇이 재미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걸 잘 모르겠다고 운을 떼는 그녀의 대답은 식은땀을 유발했지만, 영 답이 없는 수수께끼 같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있어 재미있는 일은 뭔가.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람 만나는 일은 정말 좋아한다. 재미있기는 한데,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사람 만나는 일이라고 답하기가 애매하지 않은가.
*글쎄, 본인이 그렇다면야 사람 만나는 일도 충분히 취미가 될 수 있다.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충족, 해소되는 게 많으니까. 보통 만나면 뭘 하나. -근.황.토.크(웃음) 보통 싱거운 얘기로 시간을 보내게 되기 쉬운데,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들어주는 게 좋다.
*대화를 주도하는 편인가. -그런 것 같다. 상대에게 묻고 듣기를 즐긴다.
*그러면서 무엇이 충족될까? -세상 사람이 정말 다양하지 않은가. 그걸 듣고 알아가는 게 신기하다.
*그걸로 스스로 동기부여 하는 것인가. -그것보단, 나와 달라서인지 다채로운 삶에 호기심이 생긴다.
*술자리, 술을 좋아하는 편인지. -잘 마시는 편은 아닌데, 취업 후에 주량이 늘었다. 지금은 한 병 반 정도.
*취미가 없다고 했는데, 적어도 관심 가는 것은 없나.
- 음…. 아이돌, 요즘 대세인 요리 등, 한 분야에 집중되진 않지만, 세상사에 두루 관심은 많은 편이다.
*본인은 요리하는 여자? -사실 요리는 하는 것보다 보고, 먹는 걸 더 즐긴다. 그래도 엄마 솜씨를 닮아 소질은 있는 것 같다. 내가 해먹는 게 대체로 사 먹는 것보다 맛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뭘 하는지. 스트레스 해소법? -자는 편 아니면, 누워있거나(웃음), 영화도 자주 본다.
*대체로 충전의 시간인 것 같다. -맞다. 영화도 대화하려고 본다. 주로 함께 있는 시간을 위해 쓰는 편이다.
대화 속에서 재민은 그저 평범한 여자 같다가도 순간순간 너그러움을 드러내곤 했다. 이어, 열심히 사는 삶을 보는 게 좋다는 반면, 자신은 열심히 사는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녀에게 열심히란, 정해둔 목표를 향해 효율적으로 매진하는 것. 체계가 꽉 잡힌 낭비 없는 삶이라고. 그녀는 점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고 매력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사는 삶, 목표를 정해둔 삶이 아니라면, 본인은 철저히 현재에 충실한 사람인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오늘을 무사히 사는 데 만족한다. 그래도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은 미루지 않으려고 한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으니까.
*그 정도면 열심히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무 생산적인 삶에 대해서는 따분하고, 내 것이 아니라고 느낀다. 적당히 노력하는 그 정도가 좋다.
*본인이 추구하는 적당한 삶은 성취하는 것 역시 많지 않을 텐데, 욕심이 없는 건가.
-맞다. 공부할 때도 나는 85점 정도가 좋았다. 노력 대비 결과가 늘 비례하지 않을 테고, 완벽이란 불가능한 거라 생각했다. 85점 만큼의 노력과 결과면 내겐 충분하다.
*만약 85점도 안 나오면?-그럼 다음엔 조금 더 노력한다.
*85점 이상이 나오면? -오 그러면 땡큐! (웃음)
재민의 ‘85점 이론’은 꽤나 신선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면 만족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그것도 일찍부터 알았다. 주도적으로 공부하거나, 적극적으로 욕심내지는 않아도 스스로 기준이 있었기에 수동적이지 않고 늘 만족했던 것이다. 이는 높은 삶의 만족도와 동시에, 또 다른 무언가를 뜻했다. 학창시절 내내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던 재민은 마침 새로 시작한 일에 무엇보다 흥미를 느끼는 중이었고, 이제 우리는 이어질 대화에서 그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재미있어서인지, 일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그렇다. 일단 재미있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 또, 엄밀히 말해 비서가 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지 않나, 다른 사람의 일이다 보니, 대충할 수 없고 더 큰 책임을 느낀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금껏 85점의 선에서 살아온 본인은 이 일에 어떻게 임하고 있나. 도전적인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맞다. 지금껏 살아온 것과는 조금 다르다. 말했다시피,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일이고, 내 능력에 그 사람의 업무 치가 달려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연히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껏 나는 적당한 노력만 해온 사람이지만, 그건 내 최대치가 아니었다. 또,한계라는 것은 스스로 정하는 거라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찾은 만큼, 필요한 노력을 할 것이고 큰 부담은 없다.
나는 놀랐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첫 사회생활에 버거워할 것 같았고, 별다른 재미있는 게 없다고 했고, 지금까지 적당한 노력을 곁들여 노는 일에 더 열심이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당찬 포부를 밝힐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게 사실. 삶에 만족을 아는 그녀는 그동안 자신의 최대치를 아껴두고 살아온 것이었다. 언젠가 진정 원하는 일을 찾았을 때 비로소 최선의 노력을 하게 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지 않았을까. 바로 지금처럼.
재민은 지금 자신이 살아온 삶 이상의 것을 만나고 있다. 말하는 내내 그 흔한 경쟁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신기했다. 누군가에 관심을 두고 살피는 일, 지금 보이는 의지가 일시적인 것만 아니라면, 아마 그것은 그녀와 아주 잘 맞는 일일 것이다. 비록 서툴더라도 처음이란 원래 그게 정상이다.
*꿈은 무엇인가? -현모양처! (정말 고민 없이 튀어나온 대답)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나.-객관적이고 심지가 굳은 사람.
*이유는? -어떤 상황에든 객관적이고 현명한 판단을 하고 싶다. 타인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서도. 또,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가진 사람이길 원한다.
*이상적인 미래의 삶은 어떤 모습인가. -현모양처로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 아무래도 챙겨주고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돕고 잘 만들어가는 게 나와 잘 맞는 것 같다.
*하루빨리 연애를 해야겠다. 이상형은?
-노력 중이다. 소개팅도 하는데 아직은 생각처럼 안된다. 자기 일에 비전을 가지고 성실히 임하는 사람. 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멋있다.
*곧 만날 수 있기를 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마냥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만 나눈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답변하는 재민과의 대화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힘들다는 하소연조차 경쾌하게 할 줄 아는 그녀였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일어나며 다음 일정을 물었더니 인터뷰와 시간이 겹친 MEET UP 모임에 못 간 터라 뒤풀이에 간단다. 그렇게 들뜬 뒷모습을 보내고 흡족했다. 재민은 정말 필요한 순간을 위해 에너지를 조절할 줄 아는 사람. 비록 지금까지는 원하는 만큼의 85점으로 살아왔을지라도, 이제 삶에 있어 그 이상의 시너지가 생기지 않을까. 조만간 완벽이 아닌, 프로정신으로 100점을 향하는 그녀를 만나게 될 것 같다. ■ (SEP, 2015)
인터뷰, 글/ 황은비(olocbol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