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세단이 국민차였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수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차는 현대차 쏘나타였으며 SUV는 디젤 엔진 고유의 진동, 세단과 격차가 큰 승차감 등의 이유로 불편한 차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세단 못지않은 편의성과 높은 공간 활용도를 갖춘 도심형 SUV가 인기를 얻으며 세단에서 SUV로 주류가 바뀌기 시작했다. 현재는 일부 세그먼트를 SUV가 완전히 지배하는 등 세단의 입지가 확실히 줄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완성차 제조사들은 각기 다른 전략으로 세단 판매량을 일정 수준 유지하고 있는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전기 세단 콘셉트카 EV4
이미 유행 중인 패스트백
지난 12일 기아는 새 전기차 전략을 공개하는 '2023 기아 EV 데이' 행사를 통해 신차를 3종 선보였다. 그중 중국 시장에서 먼저 출시된 준중형 전기차 'EV5'와 소형 전기차 'EV3 콘셉트'는 모두 SUV였던 반면 'EV4 콘셉트'는 준중형 세단으로 기획돼 눈길을 끌었다. 현행 전기 크로스오버 EV6를 납작하게 누른 듯 전통적인 세단과는 사뭇 다른 패스트백 디자인의 EV4 콘셉트는 "이걸 진짜 세단이라고 할 수 있냐", "그냥 크로스오버 같은데"와 같이 혼란 섞인 반응이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디자인은 이미 세단 시장에서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현대차 그랜저는 얼핏 정통 세단처럼 보이지만 현행 7세대는 루프 라인이 트렁크 리드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패스트백 형상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그랜저는 지난 9월 쏘렌토에 월간 판매량 1위 자리를 잠시 빼앗겼을 뿐 올해 3분기까지 누적 판매량 9만 2,119대로 내수 판매 1위를 유지 중이다. 최근 공개된 토요타 크라운 세단 역시 패스트백 디자인이 적용됐으며 현재 국내 사전 계약 중인 어코드 신형 역시 마찬가지다.
독일은 3박스 레이아웃 고수
5시리즈, E 클래스가 대표적
반면 국내 수입차 브랜드 1, 2위 자리를 다투는 BMW와 메르세데스-벤츠는 여전히 세단 라인업에서 3박스 레이아웃을 유지 중이다. 지난 5일 국내 출시된 BMW 5시리즈 8세대 모델은 유선형 라인이 곳곳에 적용됐지만 여전히 정통 세단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앞서 지난 9월 독일 IAA 모빌리티 2023에서 선보인 전기 세단 콘셉트카 '노이어 클라쎄'도 미래지향적인 외모와 3박스 세단의 독특한 조화로 화제를 모았다.
메르세데스-벤츠 E 클래스 신형 역시 첫 등장부터 현재까지 패스트백 디자인을 적용한 적이 없다. 비록 전기차 모델인 EQE는 공기 역학 성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3박스 레이아웃을 과감히 버렸으나 내연기관 모델은 그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전략 차이
크로스오버 유행에 우려도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에서 판매된 세단은 총 38만 4,099대로 집계된다. 이는 SUV(59만 3,252대)의 65%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미 SUV는 세단에 크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개선된 승차감과 정숙성, 독보적인 공간 활용성 등의 이유로 세단 판매량을 역전한 지 오래다. 세단 판매량이 급감하자 쉐보레는 크루즈와 말리부, 포드는 몬데오 등 세단 라인업을 일부 정리했으며, 국내 역시 준중형차 시장에는 현대차 아반떼와 기아 K3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완성차 업계는 준대형급 이상 세단에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조하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및 일본 브랜드는 신기술과 최신 트렌드를 강조한 진보적인 이미지, BMW와 벤츠 등 유럽 브랜드는 전통에 무게를 둬 클래식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일각에서는 세단에 SUV 디자인을 혼합하는 크로스오버, 이의 일종인 패스트백 디자인을 두고 "프리미엄 이미지가 있는 세단 모델의 디자인 경계가 모호해지면 이도 저도 아닌 실패작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