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차체, 단 두 개의 좌석, 운전자의 편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딱딱한 승차감, 그리고 심장을 울리는 거대한 엔진. 이는 페라리, 람보르기니, 포르쉐와 같은 전통적인 슈퍼카 브랜드들이 수십 년간 지켜온 ‘순수 혈통’이자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실용성이나 편안함은 이들의 사전에 없는 단어였으며, 4도어 세단은 물론이고, 특히 덩치 큰 SUV를 만드는 것은 브랜드의 철학을 버리는 ‘이단’이자 ‘배신’으로 여겨졌다.
사진 출처 = 람보르기니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이 견고했던 신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놓은, 혹은 ‘돈이 되니까’ 만든 SUV 모델 하나가, 존폐 위기에 몰렸던 브랜드를 되살리고, 다른 브랜드에게는 역사상 유례없는 부를 안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폼생폼사’를 외치던 슈퍼카 브랜드들이 ‘실용성’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맛본 순간, 자동차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사진 출처 = 포르쉐
1990년대 말, 포르쉐는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주력 모델인 911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지만, 소수의 마니아층만으로는 거대 기업을 유지할 수 없었다. 파산 위기 속에서 포르쉐는 브랜드의 운명을 건 거대한 도박을 감행한다. 바로 1948년 브랜드 창립 이래 단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 SUV, ‘카이엔’의 개발이다.
2002년, 카이엔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전 세계의 포르쉐 팬들은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저 뚱뚱하고 못생긴 차가 포르쉐라니”, “911의 영혼을 팔아먹었다”는 극단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포르쉐의 엠블럼을 달고 있으면서도, 5인승의 넉넉한 공간과 실용적인 트렁크를 갖춘 이 SUV에 전 세계 부유층의 주문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포르쉐는 정확한 시장 수요를 꿰뚫어 본 것이다. 슈퍼카 브랜드의 주 고객층 역시 일상에서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주말에는 가족과 레저를 즐길 편안하고 실용적인 데일리 카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왕이면 그 ‘데일리 카’에도 포르쉐의 엠블럼이 붙어 있기를 원했다. 카이엔은 이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켰고, 출시와 동시에 역사상 유례없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포르쉐를 파산의 수렁에서 건져내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자동차 회사로 부활시켰다. 카이엔이 벌어들인 막대한 현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순수 혈통 스포츠카인 911의 신형 모델과 전설적인 하이퍼카 ‘카레라 GT’를 개발하는 든든한 자금줄이 되어주었다.
사진 출처 = 람보르기니
포르쉐 카이엔의 압도적인 성공을 지켜본 경쟁사 람보르기니 역시 더 이상 SUV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비록 LM002라는 군용 트럭 기반의 SUV를 만든 과거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럭셔리 SUV 시장 진출은 2018년 ‘우루스’가 처음이었다. 람보르기니는 우루스를 단순한 SUV가 아닌, ‘슈퍼 스포츠 유틸리티 비히클(SSUV)’이라 명명하며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려 애썼다.
결과는 카이엔을 뛰어넘는 ‘대성공’이었다. 우루스는 2018년 출시 이후 전 세계적으로 2만 대 이상 팔려나가며, 현재 람보르기니 전체 판매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캐시카우’로 등극했다. 사실상 오늘날의 람보르기니는 우루스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루스의 성공은 SUV가 브랜드의 수익성을 얼마나 극대화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스포츠카보다 차체가 커서 개발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폭스바겐 그룹의 다른 럭셔리 SUV(아우디 Q8, 벤틀리 벤테이가 등)와 플랫폼을 공유하여 개발비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다. 반면, ‘람보르기니’라는 이름값 덕분에 매우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엄청난 수익성으로 이어졌다. 우루스가 벌어들인 막대한 자금은 아벤타도르의 후속작인 ‘레부엘토’와 같은 V12 하이퍼카 개발에 재투자되며, 브랜드의 ‘진짜 심장’을 계속 뛰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사진 출처 = 페라리
포르쉐와 람보르기니가 SUV로 막대한 돈을 버는 동안에도, 슈퍼카의 정점이자 자존심의 상징인 페라리만큼은 꿋꿋이 버티는 듯했다. 페라리의 전 회장이었던 루카 디 몬테제몰로는 “페라리는 절대 SUV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역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과 ‘돈의 힘’ 앞에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페라리는 결국 브랜드 최초의 4도어 4인승 모델인 ‘푸로산게’를 출시하며 실용성을 중시하는 트렌드에 합류했다. 물론 페라리는 이 차를 SUV가 아닌, ‘페라리 유틸리티 비히클(FUV)’이라고 부르며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뒷문이 달리고 차체가 높아진 이 모델은 누가 봐도 페라리식의 SUV였다.
푸로산게는 앞선 두 모델과 달리, 그룹 내 공유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페라리만의 독자적인 플랫폼과 V12 자연흡기 엔진을 고집하며 차별화를 꾀했다. 가격 역시 5억 원대 중반에서 시작하여 다른 럭셔리 SUV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푸로산게는 출시와 동시에 전 세계 부호들의 주문이 몰려들어 수년 치 계약이 마감되었다. 이는 ‘실용성을 갖춘 페라리’가 시장에서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는지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사진 출처 = 페라리
포르쉐 카이엔, 람보르기니 우루스, 페라리 푸로산게. 이 세 모델은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시장의 요구에 응답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응답은 ‘브랜드의 변절’이 아닌, ‘가장 화려한 변신’이자 ‘가장 현명한 진화’였음이 증명되었다.
순수 혈통을 지키겠다며 변화를 거부했던 브랜드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SUV라는 ‘캐시카우’를 받아들인 이들 3대 슈퍼카 브랜드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자금력과 안정적인 미래를 확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실용적인’ SUV들이 벌어들인 막대한 돈이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911 GT3, 레부엘토 같은 모델들이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