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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Feb 22. 2020

사교육, 그 달콤함에 빠지지 않을 용기

엄마 나는 형아 되면 배울 게요

7살이 되어 새로운 유치원에 다니게 된 아들은 엄마에게 뜻밖의 사실을 하나 알려주었다. 바로 배움에 대한 욕구가 크다는 사실, 그래서 가르쳐 준 만큼 아웃풋이 나온다는, 엄마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바로 사교육의 달콤함이다. 유치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놀이와 하루가 멀다 하고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아이는 푹 빠져들었고 몇 번이고 배운 것을 티 내며 엄마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정도를 사교육이라 부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사립유치원도 당연히 사교육의 범주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라서 정규수업을 마치고 다른 무언가를 또 배우고 익히러 학원을 가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장시간 보육이 최우선이었던 엄마였기에 맞벌이 위주의 유치원을 선택했음에도 유치원만 다니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그동안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세분화되어 엄마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교육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지냈다. 학원은커녕 그 흔한 방문학습지 하나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사교육을 접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의지도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아들의 성향이 가장 주요하게 작용했다. 유치원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듯 놀고 돌아와 집에서는 사부작- 혼자 놀거나 TV 시청이 가장 큰 낙인 아이 었다. 게다가 체력이 달리거나 잠이 조금만 부족해도 바로 열이 나고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아들의 건강 상태가 그걸 무시하면서까지 무리할 수 있게 놓아두질 않았다.

그러니 퇴근 후 아들을 데리고 집에 오면 7시, 잠들기 전 10시까지 그 사이에 우리에게 주어진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나는 아이를 어딘가에 보내고, 아이에게 무언가를 새로 가르치고, 아이를 닦달할 틈이 없었다. 지방에 있는 남편 없이, 도우미분 손길 없이 등․하원과 케어를 혼자 해내는 것이 미련한 자랑인 터라 그저 뜨끈한 물 받아 몇 가지 장난감과 목욕을 하고, 반찬 한 가지일 뿐인 식사라도 따뜻한 김이 나는 음식으로 배를 채워주고, 내복 차림으로 여기저기 훑고 다니는 아이를 위해 거실을 훔칠 동안 보고 싶은 영상을 직접 선별해 감상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들기 전 엄마와 함께 책 읽기 시간을 갖는 것, 이것만으로도 워킹맘과 그 자녀의 저녁시간은 가혹하리만큼 짧았다.


어느 순간엔 엄마 맘에 욕심이 조금 샘솟아 차에서 10분가량 들려주던 영어 노래도 7살에 듣던 노래는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며 거부해서 지금은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 체력을 키워줄 요량에 혹시나 등록 의사를 물어본 태권도는 선뜻하겠다고 나서 상담까지 마쳤으나 태권도를 가게 되면 유치원에서 일찍 하원 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결국 등록을 보류했고 (아들의 소원은 늘 유치원에서 마지막 두 번째로 하원 하는 것이다), 꿈에도 소원인 축구는 입학해서 방과 후 수업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그러니 특별히 학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엄마와 특별히 가고 싶은 데가 없는 아들의 마음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합쳐져 아이는 ‘슈퍼 집돌이’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 별명마저 좋아한다). 열 번 고민해서야 겨우 한 번 몸을 일으켜 데려가던 과학관도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라도 가질 못하고 자주 아파 주말엔 대부분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엄마 덕에 사교육의 꽃이 핀다는 그 시기 아이는 그저 TV와 유튜브를 번갈아 보며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행복하다니 다행인 걸까? 이런 상황 속에서 좌절하거나 초초해하지 않는 내가 이상한 걸까? 어쩌면 배움에 목마른 아이를 상대로 방치 아닌 방치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시로 자문을 하고 아이의 의중을 살핀다. 남편은 혼자 감당하는 내가 고맙다, 잘한다면서도 가끔은 운동이라도 하나 시켰으면 하는 의사를 늘 비쳤고 빈둥대며 하루를 보내는 아이와 이를 개의치 않고 두는 나를 보며 조금은 답답한 듯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 물론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내 아이에게서 모든 기대를 내려놓진 않았다. 하지만 사교육은 자연스레 선행으로 이어지기 일쑤고 나는 선행보다는 적기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편에 속할 뿐이다. 게다가 공부는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늘 책이 답이라고 생각해왔다. 책이 전부였고 책이 구원이었던 엄마의 삶이 증명해주었듯 아이에게도 그런 삶을 선물하고자 임신 때부터 책을 얼마나 사 모았는지 모른다. 그 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책 육아를 하고 싶어 사들인 책이 거실 한편을 장악해 갈 무렵 갑작스레 집을 팔게 되면서 십 분의 일도 활용하지도 못한 책을 정리해야만 했다. 이 아까운 책을 그냥 팔아버릴 수 없어 용달차를 대동해 아이가 피부 때문에 있었던 시골로 옮겨놓으며 책을 사 모은다는 사실에 회의감을 느꼈고 더 이상 책을 구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일하는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반복적으로 빌리는 일은 한계가 있었고 매번 소독하고 반납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책은 대부분 절판이기까지 해서 차라리 중고서점에서 단행본을 구입해 읽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선별한 책을 작년 한 해 하루 세 권에서 다섯 권씩, 일 년 중 300일 이상을 꼬박 읽혔다. 대부분의 시간을 빈둥거리는 아이다보니 그 시간이 좋은 건 너무도 당연했다. 유독 빈둥거리는 시간이 길었거나 TV가 재미없었던 날이면 책을 들을 때의 집중도는 무서울 만큼 높았고 일정 기간을 두고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어주면 구석구석 작은 글자, 삽화들을 모두 훑으며 책을 자기 것으로 장악해갔다. 가끔 몸이 좀 힘들거나 피곤에 지쳐 책을 읽고 싶지 않다고 하면 엄마 힘드니까 자기가 참겠다 하면서도 아이는 서운한 마음에 눈물까지 훔치곤 했다. 아이에게도 책이 큰 자리를 차지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자리가 잡힌다 싶었던 책 육아 비스무리한 엄마표 독서도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였다. 불을 켜 놓고 읽다 보니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는커녕 오히려 말똥 해지고 엄마랑 책 내용을 이야기하고 싶어 잠드는 시간이 자꾸만 늦어졌다. 얼른 재우고 나서 나도 좀 쉬고 싶은데 이게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으니 조금씩 심통이 나고 좀 많이 읽었다 싶은 날은 목이 아파 짜증까지 났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화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모면할 요량으로 책 권수를 줄이고 불을 다 꺼버렸다. 그리고 어두워진 방 안에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어둠 속에서 아이의 귀는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열렸고 눈을 감은 채인 나는 쉼이 조금 허락된 터라 짜증이 잦아들었다. 허공에 대고 노래를 부르는 일은 마치 수행과도 같았다. 말 그대로 방치 아닌 방치가 가능했던 것은 매일 잠들기 전 쏟아부은 약 40분가량의 이 정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래를 불러주는 시간은 아이가 집착했던 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이었고, 낮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낸 엄마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는 시간이었으며, 잠의 세계로 평온하게 들어가는 경건하고도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처음엔 <노을> 같은 가사가 고운 동요를 불러주다 <모래요정 바람돌이> 같은 만화영화 주제가도 불러주고, 그러다 더 이상 불러줄 노래가 없자 그냥 내가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옛날 노래들을 소환했다. 지금은 잘 부를 일 없는, 다소 촌스럽지만 대부분 가사가 쉽고 멜로디가 평이해 의미 전달이 모호하지 않은 그런 곡들이었다. 노래는 금방 열곡이 되고 스무 곡이 되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날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흡수력이란 놀랍기 그지없어 한 번에 거의 반 이상을 따라 불렀다. 중얼거리지도 않던 아이가 자기 안에서 흘러넘치는 노랫말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른 것이었다. 그 많은 곡 중 하필 아이 입에서 나온 건 ‘영~ 책갈피에 꽂아둔~♬♩♪’으로 시작하는 이선희의 <영>이라는 곡이었다. 소름이 돋고 한편으로 우습기도 했다. 아이가 따라 부르지 않을 법한 곡임에도 온전히 집중하고 듣고 있었음에 돋은 소름이었고 과연 이 아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나 부를까 싶어 났던 웃음이었다.


그래서 서서히 의도적으로 곡을 고르기 시작했다. 좋은 가사를 음미하며 부르길 바랐다. 이 사실을 남편과 공유하자 남편도 신기하다며 말없이 기타를 구입하고 연습해 우리가 제주집에 가던 날 직접 연주를 하며 불러주었다. 엉겁결에 가족이 함께 부르는 ‘가족송’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의도치 않은 성과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단어 배우기를 좋아하던 아이는 작사가의 정제된 선별 덕에 단어의 미묘한 차이도 더 잘 캐치하게 되었다. (얼마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까지 따라 부르며 남자는 다 그러냐, 나도 그러냐는 질문을 들으니 이젠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소소한 재미를 경험하며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노래나 부르고 책이나 읽으면서 유치원을 졸업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나 천천히 달릴 테니, 너도 뛰지 말고 기다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끔은 이 엄마도 영어도서관이라는 데를 보내고 싶어 주변을 기웃거리고 연산은 기본일 뿐이라는데, 사고력 수학까지는 못 시켜도 공부방이라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돈 좀 있는 집에서 한창 유행이라는 하키는 못 시킬지언정 축구나 수영도 안 보내는 엄마는 좀 자격이 없는 게 아닌 가 싶을 때가 찾아오긴 한다. 낮에 소그룹 짜서 진행하는 레고 수업엔 끼지도 못하면서 시간당 6,000원 하는 동네 블록 방에 2주는 졸라야 겨우 한 번 넣어주고, 우리 어렸을 땐 그냥 동네 누비며 아무나 할 줄 알았던 줄넘기마저 학원에서 배우는 요즘 사교육 시장에서 신식이지 못한 엄마는 결국 귀를 닫고 눈을 감아 버린다.


그런데 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은 1분 1초가 아쉬우리만큼 빨리도 지나는데 아이와 있는 시간은 무한대로 다가와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아휴직 복직 후 행복지수가 높아졌다) 그러니 뭐라도 시간을 때울 것이 필요하고 그 와중에 뭐라도 배워야 직성이 풀리는 맘이 이해가 갔다. 그래서 더더욱 학교 수업 이외에 사교육으로 무언가를 가르치지 않고 버티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중․고 학부모의 98%가 사교육을 시킨다는 지난 1월 기사를 본 뒤 우리 아이는 2%에 속하는 아이라며 남편과 씁쓸한 농담을 주고받던 게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 아이는 언제 그 2%에서 나오게 될까? 겨우 알파벳만 익히고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해외출장을 다니는 부서에서 밥 벌어먹고 사니 일말의 가능성으로 비벼보고 싶은 엄마의 케이스는 이제 들먹이기 조차 부끄러운 고전 아니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파닉스 기초까지는 엄마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읽기를 위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파닉스를 반드시 떼주어야 할까? 영어능력에서 리딩보다는 듣고 말하기에 치중하고 싶다고 이상적인 논리를 펼치다 문법 위주의 한국식 영어에 어쩔 수 없이 나도 ‘암기 달달’을 강요하게 될까?

많은 고민 속에 올해 3월 초등학생이 되는 아이는 부모의 맞벌이 유지를 위해 저녁 7시까지 돌봄이 가능하다는 사립 초에 입학한다. 이 한 가지를 결정하는데 이사, 이직, 사교육 등 정말 많은 것이 고려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내린 결정에도 누군가는 색안경을 끼고 오해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거의 무료다시피한 공교육을 두고 한 사람 월급의 약 30%에 준하는 금액을 부담하겠다는 선택이 조금 과한 선택이지 않냐는 것이다. 굳이 그 비용을 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남편을 설득시키고 함께 살고 있는 친정 부모님을 이해시키는 데도 시간이 필요했으니 내가 굳이 시간을 할애해 설명하지 않는 한 내 입장을 이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물심양면으로 아이케어에 올인한다는 사립 초 아닌가?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엄마의 선택이라기엔 내가 보기에도 아이러니한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실제로 12시 반이면 끝나는 공립학교 일정 이후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도저히 메꿀 엄두가 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4~5시간을 채우기 위해 학원을 돌리다 보면 사립학교만큼의 비용이 든다는 사실은 굳이 항목별로 다 나열하지 않아도 알만 한 사람은 다 알 정도로 흔한 일이다. 그러니 교육에 관심이 많은 특정 카페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 교육비로 얼마를 쓰는지 공유하는 글이 올라오는 것일 것이다. 그 금액을 듣고 나면 입이 떡 벌어지고 내가 사립 초에 지불하는 비용은 오히려 합리적인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이다. 정말이지 이 정도면 한 곳에서 일관된 케어가 가능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다지 높은 비용이 아닐지 모른다. 셔틀로 여기저기 이동시키지 않고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체크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큼 안심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3년 전 처음 점찍어두었던 학교에 보내고자 그 주변에 실제 분양까지 받았으나 결국 눈치작전으로 학교를 변경해 입학원서를 냈다. 그 학교는 경쟁률이 5:1이었고 내가 선택한 학교는 미달이었다. 꼭! 반드시! 입학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모집인원이 미달인 학교를 선택할 만큼 사립 초를 보내겠다는 의지가 강렬했던 나는 솔직히 1순위도, 2순위도 아닌 지금 학교에 대한 기대를 아주 많이 내려놨었다. 교육비를 보육비라 생각하고 그 비용 지불할 테니 학교에 안전하게만 있어다오 하는 심정으로 선택한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야심차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지금은 아이도 나도 모두 기대 중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축구, 악기, 미술 등 예체능은 대부분 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다른 과목은 아이가 새 학기를 적응하고 난 뒤 조금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 사립초를 계속 다닐지 공립으로 전학을 하게 될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아이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타부타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다니고 싶은 학교가 어디인지 의향을 물어 결정할 생각이다. 언뜻 사교육을 시키지 않은 것이 무슨 대단한 소신인마냥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교육을 부정하기 보다는 워킹맘으로서 시간의 부재를 말하고 싶은 것이고 사교육을 알아보고 그 시간에 맞춰 라이딩 해주는 것 자체가 너무나 많은 노력가 수고가 필요해서 나는 차마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학교에서 시켜주는 교과 외 수업은 마치 사교육이 아닌 것 마냥 양쪽에 발을 담구고 어느 정도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입학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요즘 교과서 연계형이라는 책을 좀 더 들여 볼까, 예습시킬 문제집이라도 좀 검색해볼까, 그동안 못 다닌 학원을 주말에라도 다니게 할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하지만 내가 어떤 모순에 빠져있다 한 들 말랑말랑한 아이의 머릿속에 지식만을 욱여넣지는 않겠다던 다짐만은 잊지 않고자 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천천히 가자고.. 여덟 살 아이가 조금 더 빈둥댄다고 아이의 삶 자체가 무너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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