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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whoneymind May 15. 2020

예술중학교, 내 자녀가 생기면 과연 보내고 싶을까



초등학교 6학년 4월쯤이었을까, 엄마가 물으셨다.

"윤정아, 너 예중 가고 싶니?"


학창 시절 미술대회에서 항상 최고상을 받아 미술만큼에는 자신감이 넘쳤던 나는 바로 대답했다.

"응, 가고 싶어."


갑자기 결정을 내리고, 아이들을 잘 붙이기로 유명하다는 서초동에 위치한 유명한 입시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도 첫 상담받은 날이 기억난다. 꼬불꼬불 파마한 긴 머리를 묶으시고 올블랙을 입으셨던 원장님. 깐깐함을 더해주는 얇은 은테 안경을 자주 손으로 만지시던 원장님께서는 나에게 앞으로 사야 하는 물감 브랜드와 30가지가 넘는 색들, 그리고 붓 호수가 적힌 종이를 주셨다. 그다음 날 재료를 사 와 물감을 짤 때는 화실 가이드라인에서 정해진 순서대로 짜는 것을 알려 주셨다.


이 날부터 전쟁은 시작됐다.


보통 4학년, 혹은 5학년 때부터 화실을 다니며 예중 입시를 준비하는 데에 비해 굉장히 늦게 준비를 시작한 나는 들어가자마자 치열히 그림을 그렸고, '연습'했다.


6학년 2학기의 마지막 세 달은, 초등학교 교장의 허락하에 모든 예중 입시생들이 학교를 가지 않는다. 수업, 수학여행 모두 제쳐 두고, 12시간씩 화실에 갇혀 그림을 그리며 입시를 준비한다. 맨날 음식을 빨리 먹고 어서 한 장이라도 더 그려야 한다는 마음에 얼마나 초조해지는 날들이 많았는지. 그때 나는 급성장염에 걸리기 일 수였고, 자주 체를 했다.


하루 종일 아침저녁으로 소묘, 그리고 수채화를 한 장씩 그렸는데, 원장님은 매일 점수를 매기셨다.

"노윤정. 음, 소묘는 A-. 수채화는 B+.

넌 색깔은 참 예쁜데, 너무 딱딱해.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 좀 내봐."


점수가 나올 때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었는지. 그리고는 입시시험이 있기 한 달 전쯤 이였던가. 조금만 틀에 벗어나는 색깔을 쓰거나, 답안지 같은 그림이 나오지 않으면 엎드려뻗쳐를 시켰던 원장님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이런 군대생활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12 시간 씩 그림을 그렸고 화실 안은 항상 긴장감이 돌았었다. 원장님께서는 줄 곧 우리에게 다른 화실에 다니는 친구에게 우리가 쓰는 기법을 알려주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하셨다. 만약 개인 레슨을 따로 받는다면, 그것도 룰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어떤 아이는 예원에 붙고자 일요일에 따로 개인 레슨을 받았는데, 결국 원장님께 걸려 화실에서 쫓겨났다. 우리 앞에서 대놓고 창피함을 주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 원장님은 아이들에게 선택권과 자율권을 주지 않고, 어느 학교에 지원해야 하는지도 자기 맘대로 나누었다.  


"너는 예원. 그리고 넌, 선화로 지원해."




찬 바람이 불던 11월 무렵, 입시 고사 당일. 나를 괴롭히던 질투 많던 J라는 여자아이와 같은 차를 타고 입시장으로 향하는데, 그 아이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 차를 타고 가면, 둘 중 한 명이 떨어진대. 우리 둘 중에는 누가 붙을까?"


그 당시 성격이 강하지 않았던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6학년짜리 아이 입에서 어떻게 저런 말이 나왔는지.


7개월의 입시기간 동안 나는 별의별 경쟁구도를 다 접했고 그 과정 속 뿌듯함, 성취감, 기쁨, 슬픔, 수치심, 좌절 등 많은 감정을 배워나갔다.




그 해 겨울, 나는 예원학교에 합격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들어가서도 계속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했던 나는, 그 과정을 즐겼다. 내가 유일하게 열정적으로 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색을 유난히 잘 쓴다고 칭찬받았던 나는, 미술전공 실기고사를 보면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특히 유화를 좋아했는데,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아주 '예쁜 색'으로 고대로 옮기는 교리를 따르며 답안지 같은 그림을 그렸다.


사과를 칠할 때는 캐디미윰 오렌지로 시작. 그 면 옆에 버밀리온. 그리고 따라오는 레드 옆에는 울트라 마린 블루를 살짝 섞은 갈색을 만들어 사과의 볼륨을 완벽히 구사시켰다.


얼마나 외웠으면 아직도 기억하는지.  


그렇게 공식화된 틀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던 나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던 시점이 있었다. 바로 토론토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부터이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토론토로 이주한 나는, 미술전공을 이어가고 싶어 혼자 수색해 시험을 보고 예고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받은 프로젝트는 "사과 프로젝트 (apple project)"였다. 그런데, 사과가 없는 사과 프로젝트란다.


"응?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프로젝트 콘셉트를 이해하는 데에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사과로 연상되는 것들을 5개 이상 만들어오라는데, 쥐어짜 내는 게 너무 힘들어 얼마나 낑낑거렸는지. 앞에 놓인 사과를 빨갛고 탐스럽게 옮겨 담는 그림을 그렸던 나에게, 처음으로 누군가 나만의 아이디어와, 목소리를 내어보라고 물어보는 것 이였다.


남들보다 짧게 준비한 입시, 결과는 합격.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거만함에 빠져있었던 나를 한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윤정, 네가 해왔던 건 예술이 아니야. 그냥 그림 그리기 '연습'이지.'


그렇게 나는 토론토에서 다닌 예고에서, 또 시카고에서 다닌 미술대학의 공부를 통해 차차 그림 속 나를 찾아가는 법을 배웠다. 비로소 그림을 '연습'하는 것이 아닌 그림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진짜 내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간은 쉽지만은 않았다. 또 오랫동안의 세뇌받으며 만들어진 나의 그림을 깨부수려 애를 썼는데, 예전의 것을 깨뜨린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는 것을 이때 배웠다. 오래된 습관으로 남들이 보기에 '예쁜'그림을 아주 잘 알았던 나는,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시카고에서 미술대학을 다닐 당시, 마지막 졸업전시는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사실 내가 제일 잘 그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걸고 싶던 그림은, 색을 무지막지하게 잘 쓴 풍경화였다. 다시 말해, 남들이 사고 싶을 법한 그림.


하지만 졸업전시는 정말 나에게 중요한 클로징인 만큼, 내가 여기서 무엇을 배웠는지 제대로 표현하는 작품을 걸고 싶었다. 나는 졸업전시회에 걸만한 작품을 딱 두 개로 간추렸다. 예전에 그리던 풍경화 작품 한 개, 그리고 온전히 나를 표현한 개념미술 작품 한 개. 후자는 처음으로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세계와 암호를 담은 작품이었다.


전자를 고를까, 후자를 고를까 끊임없는 고민에 빠졌다. 한 달쯤 고민하고 친구들에게 상담도 받았던 것 같다.  


고민을 하던 중,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남들이 좋아할 법한 그림을 고르면, 전시회 때 사람들이 사려고 달려들겠지? 하지만 결국 평생 남의 시선의 노예가 될 거야. 나는 이 학교들 다니며 드디어 과거의 기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을 알아가는 것이 너무나 소중했어. 결국 내 목소리를 찾게 도와준 작품이 더 의미 있어.'


나의 예전 것을 깨뜨리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생각만을 담은 그림을 졸업전시에 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였다.


"역시 윤정이는 이런 테크닉이 있네"라는 코멘트를 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남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혼자 꿋꿋이 설 수 있는 것, 그것을 수용하는 자체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도전이었다.


항상 남들이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것, 겉으로 예쁘고 흠이 없는 것을 추구했던 나. 이 과정을 통해 더 이상 남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되는 용기를 처음으로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이 것은 그림만이 아닌 나의 모든 것에 연결이 돼있었던 부분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수용하는 과정, 타인의 시선에 무게를 두지 않는 것은 결코 한 번에 바뀌지 않았다. 뉴욕으로 건너와 미술심리치료 대학원을 다니며 심리치료를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나는 내 안의 진짜 모습을 깨달아 갔다. 끊임없이 테라피를 받아가며 내 속의 내면 아이,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상처들을 하나하나 프로세스 해 나갔다. 그때, 나와 같은 영어이름을 갖고있던 테라피스트를 붙잡고 얼마나 많은 눈물과 콧물을 흘렸는지. 테라피를 받고 나오면 내 눈의 마스카라는 항상 번져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는, 옷, 학벌, 타이틀 등 겉의 모습과 거짓 자아(False self)에 얽매였던 완벽주의의 나를 하나씩 놓아주고 지워가는 법을 배워나갔다. 제일 중요한 내 안의 나를 '내가' 믿어주며, 다시 가치를 쌓아나가니 나의 자존감은 점점 건강해졌다. 고군분투 끝, 예전보다 남의 시선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에서 그 어린 나이에 받은 트레이닝에서 배울 수 있던 '끈기'는 지금의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 끊임없이 노력하면 모든지 늘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성실한 습관도 생겼다. 세상은 치열하다는 것도 그 어린 나이에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 경험한 혹독한 트레이닝 때문에 자주 찾아왔던 마음의 긴장상태, 그리고 결과주의에 갇혀 나의 자존감이 결과에 따라 휘둘렸던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내 인생의 반은 한국에서의 배움의 시간을 통해 끈기와 성실한 자세를 습득할 수 있었고, 나머지 반은 북미에서 내 보이스와 창의성을 발전시켜 나만의 색깔을 찾아갈 수 있었다.




누군가 나중에 나의 자녀도 한국에서 예술중학교를 보내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답할까. 내 자녀가 나의 끼를 물려받아 나에게 예술중학교를 보내달라고 조른다면, 나는 과연 보내고 싶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한국 교육에서 받았던 그 틀 (정해진 답, 겉모습, 결과주의)을 깨부수며 나만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이 사실 너무나 힘들었고,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종종 재발하기에, 끊임없는 자아성찰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 혹은 결과가 아니다. 남이 0에서 5를 갈 때, 내가 -5에서 4를 수행했다고 치자. 사람들이 보기에는 5에 도착해 있는 그가 더 번쩍일 수 있겠지. 하지만 나만 놓고 봤을 때,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내가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 그리고 그 과정이 훨씬 더 의미 있는 것 아닐까.


나중에 나는, 내 자녀가 혼자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행을 하도록 도와주고 싶다. 아이의 생각을 먼저 물어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 속,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다.


자신만의 건강한 정체성을 찾는 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유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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