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변화이며, 삶은 의견이다.
“우주는 변화이며, 삶은 의견이다.”
2,000년 전, 로마의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터의 막사 안에서 스스로의 다짐을 명상록에 기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SNS의 ‘악플’ 한 줄에 밤잠을 설치고, 직장 상사의 서운한 평가 한마디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것을 그가 본다면 아마 빙그레 웃으며 똑같은 문장을 건넬지도 모릅니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이 칭찬보다 비난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를 ‘부정성 편향’이라고 부르죠. 우리 조상들에게 타인의 비난은 곧 부족에서의 추방과 죽음을 의미했기에, 우리의 뇌 속 편도체는 비난을 들으면 마치 숲속에서 굶주린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비상벨을 울립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 본능적인 공포를 잠재울 강력한 철학적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모든 것은 의견이다”라는 마르쿠스의 통찰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은 무능해”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순간 우리는 그 말을 ‘사실(Fact)’로 받아들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손에 땀이 나며, 내가 정말 무능한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과거의 실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하죠. 그러나 아우렐리우스는 말합니다. “그것은 그의 ‘의견’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요.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타인의 비난은 그 사람의 필터를 거쳐 나온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가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났을 수도 있고, 자신의 열등감을 당신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비난은 상대방이 쏜 화살이지만, 그 화살에 독을 묻혀 내 심장에 꽂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의 ‘판단’입니다. 내가 그 비난에 동의하지 않는 순간, 화살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르쿠스의 원칙이 ‘칭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칭찬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칭찬 역시 타인의 ‘의견’일 뿐입니다. 결국 타인의 찬사에 일희일비한다는 것은, 내 기분과 가치의 운전대를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칭찬에 지나치게 기뻐하는 사람은 반드시 비난에 처절하게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타인의 입’에 내 행복을 맡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대화의 시작은 칭찬과 비난이라는 외부의 파도에 내 마음의 닻을 고정하지 않는 것, 즉 ‘평판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 철학을 현실의 대화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상처를 덜 주고받는 대화의 핵심은 ‘형용사를 빼고 동사를 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에서 상처를 입는 이유는 대개 ‘가치 판단’이 섞인 언어 때문입니다.
• “너는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가치 판단/의견)
• “네가 약속 시간에 30분 늦어서, 내가 기다리는 동안 계획이 차질을 빚었어.” (객관적 사실)
스토아적인 대화는 상대를 심판하는 ‘판사’의 언어가 아니라, 현상을 관찰하는 ‘과학자’의 언어를 지향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조언할 때도 “내 의견으로는 이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 같아”라고 말하며, 그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상대의 이성을 존중하는 최고의 예우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우리 마음속에 외부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요새(Inner Citadel)’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비난하거든 속으로 이렇게 되뇌어 보세요.
“저 사람은 단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오직 내 이성만이 판단할 수 있다. 그의 의견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미리 상처받지 말자.”
건강한 대화란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의견이 내 존재 자체를 흔들 수 없다는 단단한 믿음 위에서, 서로의 관점을 담백하게 교환하는 과정입니다.
오늘 누군가 당신에게 날카로운 말을 던졌나요? 혹은 지나친 찬사로 당신을 들뜨게 했나요? 기억하세요. 그 모든 것은 그저 ‘의견’일 뿐입니다. 당신이라는 본질은 타인의 혀끝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선택과 행동으로만 증명되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