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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다 Jan 22. 2020

시작

초등학교때 내 꿈은 게임 만드는 사람이었다. 사실 많이들 그랬을걸. 그러려면 도구가 있어야 한다. 마침 우리나라에는 벤처 열풍이 일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과 진배없다. 그중 한 신생 제작사에서 만든 게 게임제작 툴 RPG다이스 되시겠다. 그 소식을 소년동아에서 읽었다.



소년은 설렜도다.


그래, 이거다! 이게 있으면 게임을 만들 수 있어!


나는 하루에 몇백원 하는 용돈을 세 달은 모아 다이스를 샀다. 가격도 기억이 난다. 29,700원. 이 돈이면 지금은 택시타고 사무실에서 우리 집까지 반도 못 가는데... 하여튼 다이스는 동네에서 팔지도 않기에 멀리 테크노마트까지 가야 살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만큼 설렜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기자회견을 펼치고 있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개쩌는 명작 게임을 만드셨죠? 아,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요.


그런데 제기랄. 너무 들뜬 나머지 다이스를 버스 안에 두고 내린 것이다. 대체 어찌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펑펑 울며 집에 왔다. 에라이 등신아. 버스 안에 뭘 두고 오는 역사는 몇년 후 또 이어진다... 어쨌든. 나는 이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을 썼다. 자유게시판에다가.


안녕하세요. 저는 게임 개발자가 꿈인 초등학생이에요. 오늘 다이스를 샀어요. 그런데 바보같이 사자마자 잃어버렸어요. 그래도 샀을 땐 너무너무 좋았어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래, 못 만들면 좀 어때? 어차피 원하는 걸 못 가진 게 처음도 아니잖아.

며칠 뒤, 집에 소포가 하나 날아왔다. 뜯어보니 그 안에는 새 다이스가 들어 있었다. 맙소사! 마치 버스에 두고 왔던 다이스에 발이 달려서 내게 돌아온 것만 같았다.


박스 안에는 쪽지도 한 장 들어있었다.


우리 프로그램을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이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글을 본 제작사에서 새 제품을 보내준 것이다. 그게 바로 사진 속 시디 되시겠다.


이 제작사는 남들이 안 가본 길만 골라서 갔다. 모험심 다분한게 지금의 스타트업 못지않다. 세계 최초 클레이애니메이션 게임을 만들었다(다 못 만들었지만). 매출 안 나오기로 유명한 게임 제작 툴을 만들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꼬맹이가 잃어버렸다는 시디를 보내줬다. 그래서일까, 얼마 후 이 회사는 투자가 끊기며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작은 배려 덕분에 게임을 만들다가 상도 타고 싸우기도 하고 때려치고 만화를 그리다가 영화를 만들다가 소설을 쓰다가 책을 만들다가 흘러흘러 다식성 콘텐츠 생산자가 되었으니까. 회사 입장에선 작지만 귀찮은 배려지만, 내게는 인생의 방향을 잡아버린 사건이었다. 어찌 잊을까.


이 회사의 이름은 단다 소프트이다.


콘텐츠를 만들면서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닉네임으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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