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설계 한번 받아볼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면 십중팔구 똑같은 소리만 늘어놓습니다.
장기는 비과세 혜택이 있는 보험으로 묶고, 중기는 수익률을 노리는 펀드에 넣고, 단기는 안전하게 적금으로 가자고요. 보너스로 보장성 보험을 '저축성'인 것처럼 살짝 비틀어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죠. 누굴 만나도 이 구성이 돈을 가장 잘 모으는 '황금 세팅'이라고 말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건 기만입니다.
흔히 장기 투자를 하면 리스크가 상쇄된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그건 국가나 대기업 단위에서 안전한 채권을 운용할 때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채권 이자보다 높은 수익을 바라는 순간부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리스크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재무설계사들이 일부러 사기를 치는 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의 '계획'이 틀렸을 뿐입니다. 채권 수익률을 넘어서는 확정적인 저축과 투자 계획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월스트리트의 천재들이나 거대 자본들이 왜 굳이 수익률 낮은 채권을 사 모으겠습니까? 기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기대를 현실에서 반드시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입니다.
공부하고 노력하면 채권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투자의 성공은 땀방울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투자가 모든 사람의 '교양 필수'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5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벌려 할 때, 실패하면 그저 만 원만 못 버는 게 아닙니다. 내 목표가 고작 만 원이었을지라도 시장 상황에 따라 2만 원, 3만 원, 심지어 원금 5만 원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수익과 위험은 비례한다"는 말을 작위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시장은 천 원을 벌려다 10만 원을 통째로 잃을 수 있는 비정한 곳입니다.
진짜 재무계획은 '계좌 잔고를 어떻게 늘릴까'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내 소득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쓸까'에 대한 계획이어야 합니다. 허상의 수익으로 꿈을 그리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내가 벌고 있는 돈의 용처를 정하는 것이 진짜 설계입니다.
그렇다고 이 소득을 단순히 먹고 자는 생존 비용에만 쓰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아래 수치를 한번 보시죠.
(이자 2.4%, 물가 3% 가정 시 40년 치 생활비 기준)
만약 지금 당신의 잔고에 5.4억 원이 있다면,
"이건 내 40년 치 생활비야"라며 금고에 넣어두기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돈으로 새로운 소득을 만들기 위한 무언가를 하겠습니까?
혹은 알지도 못하는 주식이나 코인을 투자해 보겠습니까?
지금 당장 그 목돈이 없더라도 계획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돈을 묶어두는 게 아니라, 어떻게 써야 가장 효율적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계획적인 소비란, 지출을 통해 '나의 가치'를 올리고 그것을 내 능력의 확장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단순히 "코딩을 배워라", "영어를 해라" 같은 뻔한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해, 이제 와서 "코딩을 배우고, 영어를 하는 것"으로는 이미 20대부터 좋은 대학을 나와 스펙을 쌓아온 이들의 소득 격차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돈을 잘 벌고 있는 사람을 따라하기'보다 우리에겐 '영감을 주는 소비'가 필요합니다. 오늘만 살고 죽자는 식의 탕진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기 위해 돈을 써보는 경험입니다.
직접 사봐야 압니다.
명품백을 내 손에 쥐어봐야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감을 주는지, 내 욕망의 크기와 질감이 어떠한지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직접 경험해봐야 합니다.
파인다이닝의 정교한 서비스를 온몸으로 겪어봐야 그것이 나에게 어떤 감각을 깨워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직접 가봐야 합니다.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특정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고, 때로는 한 달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온전히 멈춰 있어 봐야 비로소 내 본성이 향하는 곳을 발견합니다.
이것들을 누구나 해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소비의 가치를 머릿속으로만 재단하지 말고, 직접 지불하고 겪어보라는 것입니다. 한정된 소득을 내가 궁금한 곳에 과감히 배분해 본 경험이 쌓여야만, 비로소 남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효율적인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후회 없는 소비의 경험들이 모여 내 삶의 기준이 되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에 소득을 배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줍니다.
보험의 비과세 저축(절대로 저축과 투자는 보험 상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과 펀드로 목표한 잔고를 채웠다고 가정해 봅시다. 막상 그 돈이 모이면 역설적이게도 '그 돈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잔고가 달성되는 순간, 다음 단계의 목표를 위해 또다시 돈을 묶어야 하는 굴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일의 일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5년, 10년짜리 저축에 현재의 가능성을 욱여넣고 있지는 않나요?
물론 매일매일 탕진하는 소비보다야 낫겠지만,
진짜 재무계획을 원한다면 그 돈을 '어떻게 쓸지'를 먼저 생각하세요.
단순히 모아서 한꺼번에 쓰는 것은 그 잔고의 달성도 불가능하고,
수십년을 절제하는 삶은 계획이 아니라 자기학대 일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경험하고 당신의 취향을 발견하세요.
거기서 얻은 영감으로 10년 뒤에도 새로운 소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 훨씬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미래의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나를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완벽한 재무설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