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 언니가 환갑인 줄. 언니의 남편도 몰랐고, 아들도 몰랐고, 처음엔 언니도 모르다 당일 저녁이나 돼서야 알았다고 한다. 뒤늦게 안 큰언니가 이틀쯤 지나 기별하고서야 알게 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오 남매 중 누구보다 언니와 가깝다고 생각하기에,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무릇 자매란 것이 나이 들수록 가까워지기 마련이라 사흘거리로 통화하는 자매들도 흔하건만, 우리 네 자매는 꽤나 격조히 지내고 있다. 젊어서는 먹고사느라 바쁜 게 핑계가 되었고,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명절이나 제사 때에나마 모이던 것도 자연스레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 남매는 서로 생일을 챙기지 않고, 그렇게 둘째 언니의 환갑도 단톡방에 드러나지 않았다. 다정함을 부르짖고 다니는 내가 제일 못됐다. 언제부터 이렇게 나의 원가족에게 건조해졌는지. 세월이 나를 이렇게 메마른 곳에 밀어다 놓은 것이리라.
마침 언니와 형부가 휴가에 맞춰 서울 대학병원으로 검진을 온다기에, 병원 근처의 적당한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다. 포터블 인덕션과 프라이팬 세트, 밀폐 용기와 식품 종합선물세트 등을 싸가니, 꼭 차를 가져오라 했다. 충주에 한 번 들러 밥도 먹고 위의 그 많고 많은 (언니에겐 무용하나 내겐 유용할 듯한) 물건들을 가져가라 청한 게 벌써 일 년째. 인도네시아에 가고 동티벳에 갈 시간은 있으면서 충주에 갈 시간은 없었나 보다. 환갑 생일을 잊은 미안함에서 오는 부채감이 없었다면 언니가 서울에 온다고 병원 앞까지 찾아가기나 했을까.
‘언제부턴가 막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 네 모습에 내가 짠하다’ 여기는 언니의 애틋함이나, 나를 각별히 여기는 형부의 관심이 무겁게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지. 닮은 이유로 만나기를 꺼리는 이가 두엇은 더 있는 것도 같고.
언니는, 평소에도 생일을 자주 잊고 살았다 했다. 이번에도 사흘 전쯤엔 곧 생일임을 깨닫고 형부와 골프를 치며 대화에 올리기도 했는데, 막상 생일 당일엔 언니도 잊고 있었다고. 생일 문자 한 통에 ‘아, 오늘이 생일이구나’ 생각하다가, 저녁에 아들과 통화를 하던 중 문득 이번 생일이 환갑임을 깨달았단다. 수명이 늘어난 요즘 환갑이 대수겠냐만, 게다가 울 둘째 언니는 동안 중의 동안이라 환갑의 반쯤 되는 반갑(?)이라 해도 믿을 지경. 스스로도 그리 와닿지 않는 기념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언니는 아들과 덤덤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서글픔이 밀려왔단다. 남들이 나를 챙겨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이렇게까지 홀대했다는 사실에 울컥했단다. 아주 오래전, ‘환갑 즈음엔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랜드에 가야지’ 꼽아두었던 버킷리스트가 그제야 생각나 황망했단다. 뾰족해진 언니는 애꿎은 아들에게 한마디 했다고.
“그렇게 미안하면, 빠른 시일 안에 취직을 하도록 해.”
학업을 핑계로 취업을 미루고 있는 아들에게 잔소리 한번을 하지 않았던 언니. 내 설움에 밀려서야 겨우 한마디 뱉은 걸 보면 습관처럼 자식을 달달 볶는 엄마들에 비해, 언니는 여린 성정의 소유자임이 틀림없다. (조카는, 어퍼컷 한 방 후려 맞은 기분이겠지.)
언니는 부자다. 나의 열 배, 아니 백 배쯤 부자일까. 충주 유지 집안 막내아들과 결혼해 종합병원 인근서 약국을 운영하는 언니는, 어떤 면에선 나보다 가난하다. 열 배, 아니 백 배쯤 시간 가난뱅이다. 목요일, 금요일 이틀에 주말을 붙여 쓰는 걸로 여름휴가는 끝이란다(그마저도 건강검진으로 반을 소진하다니!). 주말에 형부와 골프 치는 것 외에는 멀리 떠나지 못한다. 형부는 나름 자유롭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구실로 해외여행도 이따금 다녀온다. 언니는 시간을 낼 수 없다. 지방에선 믿고 맡길 월급 약사를 구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게다가 약을 다루는 일은 작은 실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지라 여간하면 언니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십 년 전쯤, 보름간 미국 여행을 떠나는 형부와 조카의 짐을 싸며 언니는 억울한 기분이 들었단다. 그 기분에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기에 살살 꼬셔 나의 딸과 셋이 삼박사일 홍콩 여행을 다녀온 것이 언니와 여름휴가를 함께 보낸 유일한 기억이다. 평일에 시간을 내지 못하니, 제주를 함께 누린 큰언니와 셋째 언니는 내 책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에 등장하지만 둘째 언니는 글로만 드러난다(나머지 세 자매는 돈이 없어 주말에 제주 가기가 어려운 것도 맹점). 그 후 네 자매가 서너 해 전쯤 남해와 순천에서 이박삼일 여행한 기억이 전부이니 우린 모두 추억 가난뱅이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엄마를 이유로 이따금 모이기도 하고, 소식도 제법 전했을 텐데. 나이 먹어도 고아는 고아라, 안 된 구석이 있다.
다섯 형제 중 가장 단단하던 둘째가 요즘은 가장 여리다. 엄마 돌아가신 날 제일 많이 울고, 제삿날마다 우는 자식도 엄마에게 젤 못되게 굴던 둘째. 이른 아침부터 새 밥 내놓으라고 강짜 부리고, 저녁 무렵 고스톱 치고 있는 엄마 친구들을 몰아내던 것도 둘째였는데. 그 딸도 엄마가 운명하셨던 나이 쉰여덟을 지나 환갑에 닿았다. 내가 내 생일을 기억 못해 그게 더 서러웠다는데, 그 마음은 진짜일까. 우리 모두의 무심함이 언니를 다치게 한 건 아닐까. 가까운 이에게 더 냉랭한 까닭은 무엇일까. 손 편지에 약간의 현금을 넣어 건넸어도 미안함은 여전히 줄지 않는다. 차 안에서 언니는 분명 눈물을 짰을 텐데, 형부가 잠자코 계셔주었으면 좋으련만.
사랑한다는 말 대신 아이슬란드 오로라 여행 정보를 추려서 보내야겠다. 약국엔 외부 약사 하나와 형부를 세팅해 두고, 시간 부자인 나를 데려가라고 꼬드겨야지. 언젠가부터 자매에게 덜 다정한 막내지만, 쿠바에서 날아온 네 개의 걱정인형을 볼 때면, 여전히 네 자매의 안부를 걱정하고 안녕을 기원한다는 것도 언젠간 알려줘야지. 내 환갑도, 꼭 잊어주오. 언니 못지않은 동안으로 짐작도 못하게 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