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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Dec 23. 2023

공부가 세월을 흘려보내고, 나는 잘 서있어요

인도네시아어 6개월 과정을 마쳤어요.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참 잘했어요.


6개월의 대장정이 어제로 끝났다.


7월 3일에 시작해 어제까지 월수금 세 시간씩,

70회, 210 시간의 수업.


취재 여행차 남도에 다녀올 때 한 번을 빼곤 결석하지 않았다.

제주에 다녀와도 아침 7시 비행기를 타고 와 늦지 않게 수업에 들어갔다.

10시에 시작하는 수업, 9시에 도착해 교실 불을 켜는 사람이었다.

(시작하고 서너 달은 다른 작업에 매여 수업 전 한 시간이 유일하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었기에.)     


관광통역안내사 협회에서 (영어 등) 자격증 소지자 대상으로 기타 언어 강좌를 열어준 덕에

새로운 배움에 푹 빠질 수 있었다.

베트남어와 마인어 (말레이 - 인도네시아어) 중 마인어를 선택했다.

현재로서는 언어는 거의 다른 언어라고 한다.

말레이어를 배우려는 의도였으나 말레이시아는 영어로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라인지라

수업은 인니어, 얼결에 인도네시아어를 배웠다.


알파벳에서 시작해 6개월 만에 대학생 수준의 문제집 풀이로 과정은 마무리되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영어로 치자면 TOEIC과 유사한 지필 시험 점수를 따야 하기에

수업 진도는 폭주열차처럼 달렸다.

헉헉댔으나 열차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종강했으나 얼마간은 시험공부에 좀 더 빡세게 매진해야 한다는...


나이 들어 배운 것의 삼분의 이는, 아니 근 사분의 삼 이상은 부질없었다.

이 공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바람은 다.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고 싶다. 돈도 벌고 싶다.

쓸모에 쓰이는 사람이고 싶다.






이런저런 시간을 돌아보면 올 한 해는

나름 잘 살아냈다. 적어도 부끄럽진 않다.

한량하고 불량한 나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내면의 소음에 걸려 넘어진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올해만큼은, 별 소득 없는 일에 일상을 담보 잡히고

마음의 대부분을 맡기고

잘 '살아내려' 용쓰고 애쓰며 한 해를 지나왔다.

생각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

잡념에 사로잡혀 허우적대지 않으려

꼬박 한해를 뭐가 됐든 부여잡고 살았다.


올해 나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잃기도 했다.

대신 나의 '조금'을 찾았다.

반짝반짝하던 것이 사라진 자리에

단단해진 나를 박아 넣었다. 그러려고 노력했다.

꼭 맞진 않아서, 헐겁거나 때론 튕겨져 나오거나.


원래의 것을 다시 찾아와 맞춤하게, 야무지게 막음하고 싶은 마음도 더러 든다.

다시 반짝이고 다시 부드러워지겠지.

대신 나는, 다시 찾은 조금의 '나'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잃은 것을 생각하면 눈물겹지만

다시 잃을 '나'를 생각하면 눈물보다 더 할 것을 알기에

잃은 것은 흘러가버렸다고 생각하고

'나'를 붙들고 살아갈 밖에.


공부가 없었다면 어찌 살았을 것인가.

귀퉁이가 무너질 나머지 귀퉁이를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에 정신이 팔려서였다.


그러느라 시간이 가고, 흘러갈 것은 흘러가고

다행히 나는, 내 자리에서 그리 멀어지지 않고

내 힘으로 잘 서있다.

 

오랜 날, 그 모든 부질없는 공부가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잘 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이 그냥, '나'같은 내가 되었다.  

배우는 동안은 슬프지 않고 가라앉지 않으니 더없이 좋았다.


이 나이의 공부는 내일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금을 위한 공부다. 

고여있지 않으려, 아프지 않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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