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같지 않아!
세상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내 맘 같지 않아!
세상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내 생각과 다른 이들의 생각이 극과 극으로 다를 때, 나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내 성에 차지 않을 때, 세상을 향해 뭐라도 항의하고 싶을 때, 그때마다 마음 속으로 외친다. “내 맘 같지 않아!”
내 마음과 네 마음
그러나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누구나 알지만, 실제 상황이 닥쳤을 때, 이를 마음으로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심지어 생의 반려자도,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도, 내가 낳은 자식도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고 다툴 때가 종종 있다. 내 마음·내 생각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정확히 다른 이에게 알려야 그들이 내 마음·내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인의 마음·생각도 마찬가지다. 내 맘·생각과 같지 않으므로, 어떻다고 알려줘야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다. 내 마음·생각과 타인의 마음·생각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내가 옳고, 타인이 그른 것이 아니라 나와 그의 생각이, 마음이 서로 달라서 이를 우선은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갈수록 내 마음·생각과 같지 않은 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잘못된 것으로 단정짓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때론 거세게 공격한다. 그렇게 되면 내 마음·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주저하게 되고, 입을 닫게 되고, 결국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아군과 적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다르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단죄하는 이분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결코 그 구성원들이 평화로울 수 없다.
원칙과 관용
원래부터 존재하던 규칙을 원칙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은 ‘원칙’을 지켜야한다고 고집스레 주장한다. 원칙은 원칙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그 전제로 무엇이 원칙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그런 원칙은 어디까지 지켜야 하고 수정될 수 있는지도 역시 합의하여야 한다. 그런데 원칙을 고수하려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원칙임을 주장하면서 어떠한 합의도, 보완도 하지 않으려 하고 그렇게 아무런 진전 없는 현 상황에 대한 비판을 하며 외려 그것에 안주한다. ‘원래부터’라고 하면 언제부터를 말하는 것일까? 누가 그런 원칙을 정한 것인가? 원칙을 고집하며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합의할 수 있는 선에서 한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 나의 원칙이 중요한 만큼 다른 이의 원칙도 그 사람에게는 중요하다. 나와 다른 원칙(생각)을 가진 이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관용(서구에서 말하는 ‘똘레랑스’)이 필요한 때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 사회 공공선을 위해 함께 토론하고 합의하는 것이다.
이기심과 이타심
인류의 오랜 화두는 ‘이기심’을 어떻게 사회에서 다룰 것인지, 그리고 ‘이타심’의 조화를 이룰 것인지의 문제였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이기적이다. 이기심이 자기 삶의 원천이자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심을 부정하면 안된다. 자본주의는 이기심의 집단화된 모습이다. 그러나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 인간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적 관점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어떻게 다루고 관리할 지를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국가안보와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의 이름으로 이기적 욕구에 대응하고, 관리하고 때론 제재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공공의 이익이 중요하더라도 개인이 있어야 사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적 욕구를 무시하고 통제할 수만은 없다. 반면 행위의 목적을 타인을 위한 선에 두는 이타심이 강한 이들도 있다. 남을 위해 헌신하고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은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공익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도 다른 한편에 이기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인간인 이상 순수한 이타심은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누가 되었든 간에 이기심과 이타심을 모두 가지고 있는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양가감정(兩價感情)
어떤 대상에게 서로 상반되는 2가지 감정이 동시에 느끼는 정신 상태를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사람에게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양가감정은 변화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원치 않는 인간의 모순되고 중첩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느껴지는 양가감정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을 따르고자 하는, 이기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타심을 가지려고 애쓰는, 이것도 저것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상반된 감정 자체를 스스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또한 내가 그런 양가감정을 가진 연약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도 그런 상반된 감정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인지하여야 한다.
욕망과 절제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욕망이라고 한다(역설적이지만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그러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 이래 정신분석학에서는 욕망을 정의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바라고 원하기 때문에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기본전제이고, 인류의 발전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오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이상이나 꿈, 이타심과 이기심도 이러한 욕망의 감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욕망을 수많은 고통을 부르는 나팔이라고 하여 이러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세를 떠나는 구도의 길을 이야기한다. 속세를 떠나서 욕망이 없어지면 좋으련만 인간의 생존의 기본전제인 욕망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자기자신을 괴롭히기도 한다. 속세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은 욕망에 붙들려 허우적대기 일쑤이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기도 해서 이를 양껏 채울 수도, 필요 없다고 버릴 수도 없다. 결국 살아있는 이상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할 수 있는 만큼은 따르되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그리고 제어해야하는) 범위 내에서 잘 관리하고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