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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대호 May 15. 2016

바츨라프 광장 - 화려함 속에 감춰진 슬픈 역사

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01. 그들의 광장이 부럽다.


체코라는 나라가 '부럽다!'라고 느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광장입니다.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있는 사람들. 책을 보거나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자유로운 사람들.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람들. 지역행사에 의해, 거리의 악사들에 의해, 행위예술가들에 의해 발걸음을 멈춘 사람들. 광장에는 사람이 모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만남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광장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광장이 부럽습니다.


프라하에는 크고 작은 광장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여행하며 마주치게 되는 대표적인 두 광장이 있습니다. 신시가 광장(Wenceslas Square, Václavskénáměstí)과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 Staroměstskénáměstí)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신시가 광장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구시가 광장에서 공연하는 거리의 악사
바츨라프 광장에서 버스킹 공연을 하는 청년



02. 화려함 속에 감춰진 슬픈 역사


체코 프라하는 백탑의 도시/황금의 프라하/북쪽의 파리라는 아름다운 수식어가 붙습니다. 여행객들은 중세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아름다움에 매료됩니다. 조금만 거닐다 보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드는 (막 사랑하고 싶어 지는) 낭만이 가득한 도시가 프라하입니다. 하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나라로만 생각한다면 반 정도만 안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체코인들의 슬픈 역사와 그 속에 자리한 정서를 이해한다면 체코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이 나라를 사랑하는 이유도 비슷한 역사와 정서를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의 역사는 우리와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신시가 광장은 우뚝 솟아있는 바츨라프 동상의 이름을 따서 바츨라프 광장이라고도 합니다. 바츨라프 광장은 동상이 있는 곳부터 끝까지의 길이가 약 700m이고 폭이 60m인 굉장히 큰 광장입니다. 과거에는 말을 팔던 마 시장, 그리고 곡물을 팔던 곡물시장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이르러 까를4세에 의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비슷하게 증축이 되었죠. 지금 이곳은 광장을 따라 다양한 레스토랑과 호텔, 상점, 은행 등이 자리하고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으로 마치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특히나 한인 민박도 광장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한국 분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곳입니다.

1348년  바츨라프 광장. @http://www.vaclavak.cz/historie.php?id=20
19 세기 후반, 바츨라프 광장, 빈티지 엽서. @Wikipedia
바츨라프 광장의 모습. @쿠시 먼 앤드 웨이크 필드, 부동산, justice.cz
바츨라프 광장에 있는 바츨라프 동상과 국립박물관.

체코는 유럽 중앙의 위치한 나라이다. @Google

하지만 이 곳은 화려함 속에 감춰진 가슴 아픈 역사와 영광의 순간을 함께 간직한 곳입니다. 흔히 체코라고 하면 동유럽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체코는 유럽 중앙에 위치한 국가입니다. 유럽을 이념으로 갈라놓고 자본주의 진영은 서유럽, 공산주의 진영은 동유럽으로 나누었던 냉전시기에 쓰이던 말이죠. 그렇기에 중앙 유럽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에 위치 한 나라는 전략적으로 볼 때 큰 장점이 될 수 있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주변 국제 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는 단점이 있죠. 체코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로 시계방향으로 폴란드,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세의 잦은 침입과 지배, 해방을 반복하는 안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체코는 360년 이상의 긴 세월을 외세에 의해 지배당했던 나라입니다. 1620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체코 신교 귀족 간의 빌라 호라 전투에서 대패하며 그들에게 약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배당합니다. 그리고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한쪽 편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으로 벌어진 이 전쟁은 4년 뒤인 1918년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납니다. 전쟁의 결과로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됩니다. 그 결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하나의 나라로 독립하게 되는데, 제 1대 대통령인 토마시 가릭 마사릭에 의해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체코 시민들이 열광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 바츨라프 광장인 것이죠.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선진 공업국으로 거듭납니다. 이 시기의 체코-슬로바키아는 대부분의 생산 지수와 국민 1인당 소득 면에서 주위의 다른 유럽 국가보다 앞서는 경제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의 바람이 체코-슬로바키아까지 몰아 부칩니다. 경제 위기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촉발시켰고, 체코 내의 정치상황을 뒤흔듭니다. 1939년, 호시탐탐 체코-슬로바키아를 노리던 독일은 우왕좌왕하는 정치 상황을 틈타 체코를 침입합니다. 이를 서구 열강들은 묵인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독일 간의 뮌헨협정(뮌헨 늑약) 체결로 체코-슬로바키아의 10년간의 평화는 한 낮 꿈처럼 사라집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킨 독일은 체코의 공업 시설과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군수 공장 화합니다. 독일 나치의 지배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더 참혹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와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하였다.뭰헨 협정 당시의 모습. @Wikimedia Commons


뮌헨 협정이 이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 @Wikimedia Commons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제2차 세계대전도 서진하던 소련의 군대와 동진해오던 서방의 연합군에 의해 독일군의 무조건 항복으로 1945년 막을 내립니다. 전쟁 이후 냉전 체제로 돌입하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상황은 공산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구시가 광장에서 공산당 위원장 고트발트에 의해 공산화되고 맙니다.

동진하던 서방의 연합국과 서진하던 소련군이 독일 동부 엘베 강의 연안에서 최초로 조우. 엘베의 맹세 기념비. @Wikimedia Commons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미군의 윌리엄 로버트슨 소위와 소련군의 알렉산드르 실바쉬코 중위. @Wikimedia Commons

이후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제, 감시, 체포, 숙청이 자행되는 공포정치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체코 시민들의 사회 개혁에 대한 열기를 막지는 못했습니다.  당서기였던 알렉산드로 둡체크를 주축으로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시정하여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경제적으로 시장 경제의 원리를 도입하려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건설을 시도합니다. 이는 한 외신기자의 의해 '프라하의 봄'이라는 타이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알렉산데르  둡체크(1921 ~ 1992)



이 개혁의 성공으로 곧 유럽 공산체제의 도미노식 붕괴가 될 것을 염려한 소련은 군사적인 행동에 착수합니다. 곧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군이 6천여 대의 탱크로 무장한 75만의 군대를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로 진입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탱크 군대는 바츨라프 광장으로까지 진입하였고 그때의 상흔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바츨라프 광장에서 바츨라프 동상을 등진 채 바라볼 때에 오른쪽은 아스팔트, 왼쪽은 돌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른쪽을 돌아들어 온 탱크에 의해 돌들이 빠져나왔고 아픈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왼쪽 돌길과는 다르게 아스팔트로 복구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은 아스팔트 길, 왼쪽은 돌길이다. 당시 바르샤바 조약군은 현재 맥도날드가 있는 건물을 끼고 돌아 들어왔다. 몇 십톤이 되는 탱크가 지나간 자리의 돌길은 산산히 으깨졌다.

'프라하의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에게 있어 소련은 형제국이라 생각한 나라입니다. 같은 슬라브 민족이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암울했던 독일 나치의 시기를 벗어나게 해 준 국가였으며, 독일의 침략을 묵인한 서유럽에 대한 반감으로 더 믿고 의지가 되는 나라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인들의 배신감은 심히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그 후로 작은 저항이 계속되지만 프라하의 봄과 같은 대규모 개혁 운동은 다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하루가 다르게 개혁 운동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었으며, 체코인들은 점점 묵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바츨라프 광장에 일대의 사건이 일어납니다.1969년 카를대학교 철학부 학생 얀 팔라흐가 이 곳에서 온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을 시도한 것이죠. 뜨거운 화염에 휩싸인 체 얀 팔라흐는 국민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체코여! 다시 깨어나라!' 그 후 얀 팔라흐의 후배였던 얀 자이츠도 그곳에서 똑같이 분신자살을 합니다. 자유에 대한 우리의 뜻을 잊지 말아달라며. 바츨라프 동상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프라하 국립박물관 앞에는 자유를 위해 죽음으로 저항했던 그들을 기리기 위한 청동 십자가 상이 있습니다.  두 학생의 분신 항거와 그 뒤 크고 작은 저항이 여론을 뒤흔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 상황에 충격을 주는 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프라하의 봄은 잊혀 갔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는 계속되었습니다.

얀 팔라흐. @Wikimedia Commons
얀 팔 라흐의 분신자살을 다룬 영화 <타오르는 불씨>의 한 장면.
얀 팔라흐가 쓰러진 국립 박물관 앞에는 청동 십자가 상로 그의 숭고함을 기리고 있다.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추모비.

40여 년 동안 지탱해 온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통제의 실패는 경제적 파탄을 일으켰고,  자유와 인권을 짓밟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젊은 세대들의 불만과 불신이 고조되어 갑니다.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정책이 동유럽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본격적인 혁명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이리하여 1989년 12월, 반체제 활동을 주도해 온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40년간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은 무너지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과정을 '벨벳 혁명'이라고 합니다. 벨벳은 굉장히 부드러운 천 재질을 말하는데, 큰 유혈 충돌 없이 부드럽게 혁명이 진행되었다 해서 '벨벳 혁명' 또는 '신사 혁명'이라 불리게 된 거죠.'벨벳 혁명' 당시 70만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이 운집하여 체코의 민주화를 열망했던 장소가 바로 바츨라프 광장 이기도 합니다. 지금 프라하의 인구가 약 100만 명입니다. 70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모였다고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모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휘날리는 체코 국기와 바츨라프 광장을 가득 매운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 @Wikimedia Commons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국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Wikimedia Commons



03. 그 나라의 역사를 안다는 것.


바츨라프 광장과 그곳에 얽힌 역사적인 사건들을 중심으로 글을 써내려 갔습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짧은 글안에 풀어쓰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자칫하다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역사로 구분 지어 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그 안의 있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어서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계속 쓰여지고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짧게나마 바츨라프 광장이라는 주제로 체코의 역사를 풀어봤습니다.


체코 근대사에 있어서 바츨라프 광장은 아픈 역사의 흉터 속에서 밝은 미래의 새살이 돋고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체코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죠. 지금의 프라하가 있을 수 있게 한 체코의 황제 까를 4세의 손 때가 묻은 곳이며,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곳이고, '프라하의 봄'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며,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숭고함이 깃든 곳 그리고 벨벳혁명의 환희가 가득했던 곳입니다. 지금도 바츨라프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 중에는 광장의 역사를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람마다 광장에 모여서 하는 생각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를 겁니다. 우리는 이제 체코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츨라프 광장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죠.. 한 나라를 여행할 때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여행을 하기 전에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이해를 한다면 우리가 보고 느낄 감정의 깊이가 더욱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한 광장을 바라보며 느끼는 의미도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여행에 있어서 정해진 방법은 없지만 역사를 안다는 것. 이것은 그 나라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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