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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대호 Jun 10. 2016

왜 그들은 이혼했을까? 벨벳이혼

Dobrý den, Praha - 체코의 모든 것.

01. 왜 그들은 이혼했을까?


1992년, 두 국가가 이혼에 합의합니다. 하나의 국가로 영원할 줄로 알았는데 말이지요. 모진 시간을 서로 의지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행복한 시간도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80년이 조금 넘는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두 나라는 이혼합니다. 과정은 부드러웠습니다. 어떠한 유혈충돌도 없이 평화로운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비폭력 혁명으로 공산정권을 무너뜨린 벨벳혁명과 같이 '부드러운 벨벳'처럼 두 국가가 분리했다 하여 이를 벨벳 이혼이라고 부릅니다. 1993년 1월 1일, 유럽의 지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체코공화국(Česká republika)과 슬로바키아공화국(Slovenská republika)으로 독립된 두 나라가 탄생합니다. 


'이혼'이라는 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혼은 결혼을 했다는 전제 아래 성립되기 때문이죠. 단지 만나고 헤어진 것을 이혼이라 칭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두 국가간의 이혼이란 것은 더욱더 깊은 차원에서의 헤어짐을 이야기 하겠죠. 결혼에 대한 완벽한 정의는 있을 수 없지만, 두 사람 간의 법률적/제도적인 일종의 계약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람에 대입하여 쓰는 단어를 국가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은 이혼한걸까요?


지난해에 체코를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의 수가 약 25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수는 매년 빠르게 증가하고 있죠. 그런데 체코에서 머무르며 만났던 여행객들 중에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한 나라였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봤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체코슬로바키아로 남아 있다고 알고 있는 어르신도 만나봤죠. 심지어 아직까지 공산국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작 가이드였던 저도 깊은 이야기는 잘 몰랐습니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합니다. 그 목적에 따라서 역사가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죠. 물론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나라를 여행함에 있어서 역사는 굉장히 큰 관광콘텐츠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무시할 수는 없죠.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역사...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플 분들을 위해. 체코를 여행했다면 또는 할 계획이라면 다른 시선으로 체코를 바라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요.




02.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먼저 결혼의 주체가 되는 두 국가 중에 하나인 슬로바키아의 사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체코는 전에도, 앞으로도 열심히 다룰 예정이니 살짝 패스.


9세기경 지금의 중부 유럽에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을 포함한 최초의 서슬라브 국가인 대 모라비아 제국이 있었습니다. 10세기 초까지 융성하던 이 제국은 아시아로부터 이동해 온 유목민족인 헝가리인들에 침입으로 무너집니다. 제국의 멸망은 두 민족을 역사적으로 갈라놓았고 1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역사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제국이 멸망하고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체코와 비교했을 때 더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게 슬로바키아입니다. 체코는 대모라비아 제국의 붕괴에도 프르제미슬 왕조가 탄생하며 합스부르크에 편입되기까지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나갑니다. 하지만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 지배당하며 아무런 자치권도 갖지 못한 체 독립된 민족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비엔나에서 오스만 제국의 기마병.

세월이 흐를 수록 슬로바키아의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16세기 강대했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입이 있은 후 헝가리 왕위에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를 잇는 중부 유럽 연합 국가를 탄생시킵니다.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하게 되고,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중의 지배와 억압을 받게 됩니다. 합스부르크> 헝가리> 슬로바키아, '엎친데 덮친 격'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 된 것이죠. 하지만 슬로바키아의 지역 발전으로 봤을 때는 긍정적인 면도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가 150년 이상 합스부르크 령 헝가리 땅의 수도가 되어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브라티슬라바 성 마르틴 대성당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헝가리 왕위 대관식이 열릴 정도였으니 대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41년, 성 마르틴 성당에서의 마리아 테레지아 대관식
성 마르틴 성당과 브라티슬라브 성

역사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을지라도 체코와 아예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4세기 후반부터 체코에서 시작된 후스주의 종교개혁운동은 슬로바키아에까지 큰 영향을 끼칩니다. 이 운동의 주요 내용 중에 하나가 라틴어로 된 성서와 찬송가를 체코어로 번역하여 일반 민중들이 쉽게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슬로바키아는 자기 고유의 문자를 아직 갖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후스주의와 함께 타고 들어온 체코 문자는 (슬로바키아와 같은 슬라브어를 사용했기에) 자연스럽게 유입됩니다. 종교적인 상황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언어를 통해 두 민족 간의 사이가 더욱 친밀해지게 되죠.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얽히고 설키게 됩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잦은 침략을 피해 이주해 온 헝가리인들과 기존의 독일인들, 슬로바키아인들이 엉키면서 분쟁이 잦아지게 되죠. 그 가운데에서 슬로바키아인들은 늘 소외되기 일 수 였습니다. 여전히 대다수의 상류 계층을 헝가리인들과 독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억눌린 민족의식이 불타기 시작하고 슬라브 민족과 기원에 대한 관심을 낳게 되죠.


19세기에 이르러서 슬로바키아의 민족의식과 체코와의 민족적 교류는 절정에 이릅니다. 1886년 합스부르크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급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대등해지는 헝가리가 두려워지기 시작하죠. 울며 겨자 먹듯 그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타협으로 이원 군주국이 되기로 결정합니다. 합스부르크에게는 굴욕적이었던 이 사건은 슬로바키아에게는 큰 시련을 안겨 주게 됩니다.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헝가리가 더욱더 강력한 억압을 가하게 된 것이지요. 슬로바키아인들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헝가리에 맞서기 위해 체코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민족 부흥 운동을 시작합니다. 특히나 교육에 대한 억압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이웃 지역인 체코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프라하 대학의 마사리크 교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연맹을 결성하고 두 민족의 협력과 연대를 이끌어 나갑니다. 이러한 두 민족의 콜라보레이션은 향후 두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기 위한 디딤돌이 됩니다.



03. Would U Marry ME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통합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고 있던 두 민족은 전쟁이 터지자 마사리크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연합국 측에 독립된 한 국가로서 인정받으려는 목적도 품고 있었습니다. 결국 전쟁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항복으로 끝이 나고 드디어 체코슬로바키아라는 하나의 나라로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아마도 두 민족이 함께 외친 독립 선언은 국제 사회라는 하객으로부터 인정받는 혼인서약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체코슬로바키아는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헝가리를 위에서 감싸게 되는 영토를 얻게 됩니다. 두 민족의 안보가 전보다 튼튼하게 되죠. 결혼은 두 민족의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1928부터 1938년 동안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체코슬로바키의 초대 대통령, Tomáš Garrigue Masaryk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마사리크의 뛰어난 정치력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로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산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선진 공업국으로 빠르게 발돋움시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괄목할만한 큰 성장을 거두게 되는데, 이 시기에 생산 지수와 국민 소득 지수에서 다른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보다 월등하게 부유한 국가가 됩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결혼 생활에 서서히 균열이 드러나게 됩니다. 가까워지기에 천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던 것일까요? 건국 인사들은 낙관했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 차이가 크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일단 체코에 비해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슬로바키아를 맞을 준비가 부족했습니다. 합스부르크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공업이 체코 쪽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전통적 농업 국가인 헝가리에 속해 있었던 슬로바키아는 농업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문화 성격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체코인들은 굉장히 자유로운 성향이었지만 산악지역이 많고 농업화 되어 있던 슬로바키아인들은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결국 불균형의 격차를 좁히기 힘들어지자 체코인들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슬로바키아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이는 슬로바키아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배신감을  초래하고 민족적 갈등을 발생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줍니다. 정치적,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민족문제가 증폭되죠. 거기에 더하여 불청객이 나타나 직격탄을 날리게 됩니다. 그 불청객은 바로 독일 나치입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는 국제 경제의 불황과 국제 정치의 분열은 일으킵니다. 그리고 베르사유 평화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시켰고 그 속에서 독일의 나치라는 괴물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나치의 수장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복잡한 민족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우선 체코슬로바키아 내에 독일인들의 민족 의식을 고조시켜 그들이 많이 거주하는 주데텐란트 지역을 손아귀에 넣습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서구 열강들과 독일간의 뮌헨협정으로 말이지요. 이를 지켜본 슬로바키아 내에 헝가리인들도 독일 나치편에 섭니다. 독일은 슬로바키아 내에 헝가리인들의 거주지역을 헝가리에 떼어주지요. 그리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도 갈라놓습니다. 슬로바키아의 민족주의를 대변하던 요세프 티소(Josef Tiso)에게 체코를 버리고 독립할 것을 제안한 것이죠. 안그래도 갈등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태였습니다. 거의 협박에 가까운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인 티소는 체코와 갈라서며 역사상 처음으로 슬로바키아만의 독립을 얻어 냅니다. 체코에게는 큰 배신감을 안겨주는 결정이었으며, 나라를 제2차 세계 대전을 위한 독일의 위성 국가로 전락시키게 만드는 결정이었죠.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던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

히틀러와 티소

체코슬로바키아가 많은 민족적 갈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간 중심을 잘 잡아왔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에 의해서 중심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독립한 슬로바키아 티소 정부는 체코인들을 모두 추방시킵니다. 이는 일시적으로 슬로바키아인들의 고용을 향상시킵니다. 독일 나치에게 전쟁 물자를 공급하면서 공업과 농업에 급속한 성장 또한 이룹니다. 나치의 보호 아닌 보호는 헝가리의 안보적 위협에 훌륭한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체감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 나치에 대한 저항 운동은 체코에 비해 저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끝에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독일 나치와 독재화된 티소 정권에 대한 저항의 눈을 뜨기 시작하죠. 슬로바키아는 다시 체코와의 협력을 통해 저항 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는 다시 한 국가로의 탄생에 초석이 됩니다. 이를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다시 하나의 국가로 회복하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당기

하지만 안타깝게도 곧바로 이념의 이데올로기에 휩싸입니다. 서서히 파고 들어온 공산주의와 친소련 정책으로 공산주의의 늪에 천천히 빠져 들어갑니다. 더는 어쩔 도리가 없는 지경으로까지 빠진 체코슬로바키아는 스탈린의 하수인인 고트발트에 의해 결국 공산화를 선언하게 되죠. 이후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과 통제, 불법적인 숙청과 체포로 대표되는 공산당의 독재가 지속됩니다. 반발과 저항이 있었지만 그마저 점차 줄어듭니다. 1963년 잠시 봄바람이 붑니다. 경제 위기와 사회주의 체제하에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둡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소련을 필두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동맹국들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당하고 불명예 조약인 '모스크바 의정서'를 체결하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소련 정부와 개혁을 주도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 체결된 이 조약에 국민들의 실망은 컸습니다. 소련에 강압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개혁적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암울했던 과거로의 회기를 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저항과 개혁 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확고했죠. 소련군의 점령 하에서도 둡체크 정권은 개혁 중 일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정치 개혁 중 유일하게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연방화를 시행하게 됩니다. 1969년 연방화는 두 나라를 구분하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테두리가 그려지고 사람들은 해당 국가의 시민이 됩니다.


이윽고 1989년 11월, 40여 년동안 지긋지긋하게 지속되어 온 공산정권이 무너집니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의 실패와 사회주의의 정치적 한계로 소련의 체제가 무너지고, 도미노처럼 동유럽 국가들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 이어 체코슬로바키아도 벨벳혁명이 성공하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게 되죠. 이웃한 다른 나라들의 경우와는 다르게 큰 유혈충돌 없이 벨벳처럼 부드럽게 말입니다. 그렇게 ČSFR(Česká a SlovenskáFederativní Republika)는 다시 탄생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40년간의 굳어버린 사회의 체제를 한 번에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벨벳 혁명 이후 급속한 개혁의 추진은 또다시 민족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여전히 체코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던 슬로바키아 지역에 큰 충격을 낳게 되죠. 공산정권 때에 슬로바키아 지역에 집중된 군수 산업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자 엄청난 실업률이 발생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개혁의 부작용이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킵니다. 그러한 바람을 타고 서로 간의 노선과 방향이 판이하게 다른 두 정당이 연방 정부와 연방 의회를 이끌게 됩니다. 경제 개혁과 정치 개혁의 추진을 둘러싼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2년간의 알력과 반목은 점점 이별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체코슬로바키아 1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이별에 대해 강하게 반대합니다. 대다수의 국민들도 생각이 같았죠. 국가 차원의 설문 조사에서, 단지 37%의 체코인과 36%의 슬로바키아인이 이별에 찬성했을 뿐이 었으니 말입니다.

합의 실패 후, 체코의 Klaus와  슬로바키아의 Mečiar 분리에 동의한다.

어쨌든 두 정당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해체에 합의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라며 말이지요.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은 해체되어 유럽의 지도에는 새로운 두 개의 독립 국가인 체코공화국(Česká republika)과 슬로바키아공화국(Slovenská republika)이 그려지게 됩니다.




04. Good friend After divorce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국기가 펄럭

역사를 보면 두 민족이 분리와 통합을 반복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두 국가는 9세기에 대 모라비아 제국 아래에서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역사를 함께해오다가 헝가리의 침입으로 분리되었습니다. 대략 1000여 년 가까이 서로 다른 역사로 살아 가지만 슬라브민족이라는 동질감과 언어적 유사성으로 교류와 연대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리고 두 민족이 가진 이해관계를 통해 결혼에까지 성공합니다. 외세에 의해 또는 내부적인 갈등과 반목으로 인해 이혼과 결합을 반복했고 1993년 1월 1일에 마침내 이혼의 길을 걷게 된 것이지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이혼이 국민적인 동의에 따른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국민들의 투표 없이 정치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 같은 결정은 현재까지 두 국가의 이혼이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양 국가의 대중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이혼에 서명했던 두 정치인의 정치생명이 불명예스럽게 끝났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생각해 볼 때, 증가하던 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서로의 안전한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상황은 좀 다르지만 과거 유럽의 화약고라 불린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의 폭력적인 해체처럼 폭력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지요.

2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두 국가는 매우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통 국가 또는 연합의 분리 이후에는 사이가 좋지 않을거라 예상하지만 두 국가의 경우는 다르다고 볼 수 있죠. 2004년,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나란히 EURO에 가입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경쟁자로 때로는 협력자로 선의의 경쟁과 교류를 함께 하며 이웃 나라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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