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뒤집은 영화 '햄넷'의 진짜 의도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EindeVu6NeU


영화 햄넷을 감상하고 극장 문을 나서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일종의 반성이었습니다. 클로이 자오 감독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노매드랜드'를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저는 아직 그 작품을 보지 못했고, 이 감독의 연출 세계를 마블의 '이터널스'로 처음 접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시에는 제 취향과 너무 결이 달라서 감독에 대한 기대치를 스스로 꽤 많이 낮춰두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 '햄넷'은 그런 저의 얕은 편견을 보기 좋게 부숴버렸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렇게 엄청난 깊이와 미세한 감정선을 다룰 줄 아는 감독이 대체 마블 스튜디오에서 얼마나 심한 간섭을 받았길래 '이터널스'에서는 그런 아쉬운 결과물이 나왔던 걸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저처럼 '이터널스' 하나로 클로이 자오를 판단했던 분들이라면 이번 작품에서 완전히 뒤통수를 맞는 듯한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거라 확신합니다.


처음 영화 제목을 들었을 때는 누구나 다 아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햄릿'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햄릿'이 아니라 '햄넷'이더군요. 사실 이 미묘한 이름의 차이는 영화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나침반입니다.


당연히 천재 극작가 셰익스피어가 그 엄청난 희곡을 도대체 어떻게 썼는지, 창작의 고뇌나 숨겨진 비밀 같은 것을 다루는 흔한 전기 영화겠거니 짐작했습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야기의 중심에는 우리가 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그의 아내 아네스와 아들 햄넷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매기 오파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천재적인 창작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신화처럼 포장하는 데는 추호의 관심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창작의 출발점이자 뼈아픈 원인이 된 상실 자체를 바닥까지 긁어모아 끝내 제대로 애도하겠다는 단단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16세기를 스크린으로 옮겨오다

영화는 16세기 영국의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도입부부터 훅 끼쳐오는 현장감이 대단한데, 인위적인 조명을 극도로 배제하고 양초 불빛과 자연광에만 의존해 화면을 채워낸 덕분입니다. 처음에는 화면이 너무 어두운 것 아닌가 싶다가도 어느새 그 서늘하고도 생생한 공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여기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새의 지저귐,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등 자연의 백색소음이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마치 제가 그 숲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 공감각적 연출은, 반드시 극장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온전히 체험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자연 속에서 약초를 다루며 살아가는 아네스가 라틴어를 가르치는 청년 윌리엄과 운명처럼 만나 가족을 이룹니다. 하지만 윌리엄은 자신의 일을 찾고 성공하기 위해 가족을 훌쩍 남겨두고 런던으로 떠나버리죠. 고향에 남아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아네스에게 당시 유럽 전역을 무섭게 휩쓸던 흑사병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결국 이 가족은 평생 가슴에 안고 가야 할 거대한 상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폭발하는 내면, 두 배우의 압도적인 앙상블

아네스를 연기한 제시 버클리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영화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저는 그녀를 영화 '멘'에서 처음 봤는데, 당시에는 영화 자체가 워낙 기괴하고 시각적으로 충격적이다 보니 배우 본연의 얼굴이 크게 각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고 오열하는 대신, 그 거대한 슬픔의 덩어리를 속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미세한 떨림들이 보는 이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남편 윌리엄 역의 폴 메스칼 역시 '애프터선' 이후로 참 영리하게 좋은 궤적을 그리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시 버클리의 훌륭한 연기에 찬사를 보내지만, 그 곁에서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서서히 부서져 가는 폴 메스칼의 텅 빈 눈빛 또한 오랫동안 짙은 잔상을 남깁니다.

햄릿에게 빼앗긴 이름, 햄넷

가장 먼저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햄릿이 아니라 햄넷이어야만 했을까요. 당시 영국에서는 햄릿과 햄넷이 서류상 구분이 없을 정도로 혼용되어 쓰이는, 사실상 같은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희대의 명작 주인공 이름과, 그가 역병으로 허망하게 잃은 자신의 아들 이름이 같았던 것이죠.


수백 년의 긴 시간 동안 허구의 왕자 햄릿에게 이름을 빼앗겨 지워졌던 실존 인물 햄넷. 영화는 그 아이에게 다시 본래의 이름을 돌려주겠다는 일종의 숭고한 선언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이면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겪은 이들이 애도하는 법을 치열하게 배워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의 죽음과 뒤를 돌아보는 일

아네스의 삶을 찬찬히 짚어보면 그녀가 크게 세 번의 죽음을 겪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죽음들은 각기 다른 형태의 상실로 아네스의 삶을 할큅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죽음입니다. 어른들은 부정이 탄다며 어린 딸이 어머니의 시신을 보는 것조차 막아섰고,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새 아내를 들일 궁리를 합니다. 아네스에게 첫 상실은 애도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다른 존재로 서둘러 채워버려야 하는 폭력적인 지워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녀의 분신과도 같았던 애완 매의 죽음입니다. 매는 자연과 맞닿아 있던 아네스의 억눌린 자유를 상징합니다. 그 매가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은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서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아네스가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서서히 잃어가는 씁쓸한 과정과 절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바로 아들 햄넷의 죽음입니다. 여기서 아네스는 과거의 상실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시신을 자기 손으로 직접 닦아내고, 그 끔찍한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억지로 메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기꺼이 그 슬픔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머무는 쪽을 택합니다.

영화 초반, 윌리엄은 뒤를 돌아보면 사랑하는 이를 영영 잃게 된다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윌리엄은 실제로 과거의 폭력적인 집도, 남겨두고 온 가족도, 죽은 아들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아네스의 생각은 다릅니다. 돌아봐, 나를 봐라고 말하는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 똑바로 응시하고, 기억해야만 비로소 진짜 애도를 할 수 있고 그 상실을 견뎌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영화는 신화의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채, 관객을 향해서도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이 가족의 비극을 모른 척 지나치지 말고 똑바로 뒤돌아봐 달라고 조용히 웅변합니다. 지워진 상실과 온몸으로 붙들고 있는 상실의 극명한 대비, 이것이 햄넷을 관통하는 정서적인 핵심입니다.


이 죽음들 사이에는 쌍둥이 딸 주디스가 사산될 뻔한 위기의 순간이 끼어있습니다. 아네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아이가 극적으로 숨을 터뜨리지만, 이는 훗날 햄넷의 죽음과 직결되는 서늘한 복선이 됩니다. 쌍둥이 남매가 서로의 옷을 바꿔 입으며 역할을 바꾸는 장난을 치는 평화로운 모습조차, 사실은 서로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다는 얄궂고 잔인한 암시였던 것입니다.

물, 구멍, 그리고 숫자 3

영화는 반복적인 상징을 통해 서사를 더욱 두텁게 만듭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의 이미지입니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윌리엄이 강물에 잠수하는 행위는 아버지가 된다는 일종의 통과의례이자 과거의 정체성을 씻어내는 세례처럼 다가옵니다.

이후 그가 런던으로 떠나기 위해 강을 건너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은, 가족의 품을 떠나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는 돌아올 수 없는 루비콘 강이 됩니다. 남겨진 자와 떠난 자 사이의 아득한 심리적 단절이 강이라는 경계로 그어지죠. 아네스가 쌍둥이를 출산할 때 둑이 무너져 집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장면은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양수가 터지며 새 생명이 태어나는 환희인 동시에, 가정을 둘러싼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 덮쳐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윌리엄이 죽느냐 사느냐를 처음 읊조리는 장소 역시 강가라는 점은 삶과 죽음, 단절의 경계로서 물이 기능하고 있음을 단단하게 보여줍니다.

구멍의 이미지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숲속의 텅 빈 구멍에서 시작해 집 2층 아이들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 그리고 마침내 연극 햄릿 무대 벽에 난 구멍으로 이어집니다. 자연에서 시작된 아네스의 삶이 가정을 거쳐 남편의 예술 세계로 옮겨가는 시선의 궤적이 이 구멍들을 통해 연결됩니다. 구멍은 텅 비어버린 상실의 흔적인 동시에, 막혀있는 벽을 뚫고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역설적인 통로가 됩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구멍 너머로 우리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는 서글프지만 다정한 위안을 줍니다.


숫자 3의 변주도 치밀합니다. 인물들이 부르는 민요 가사에서 시작해, 세 명의 아이들, 세 번의 죽음, 세 개의 구멍까지. 본래 3은 완벽과 균형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하지만 햄넷의 죽음으로 세 아이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 그 견고했던 균형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영화가 끊임없이 3이라는 숫자를 시각적, 청각적으로 노출시키는 이유는 하나가 떨어져 나갔을 때 체감되는 그 끔찍한 불완전함과 상실감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햄넷이 사경을 헤맬 때 검은 천 너머로 아이를 응시하는 서늘한 관찰자 시점이 등장합니다. 감독이 죽음 그 자체의 시각을 표현하려 했다고 밝힌 이 앵글은, 훗날 마지막 연극 무대 세트장 안쪽에서 무대 위 아들 햄릿을 바라보는 윌리엄의 텅 빈 시선과 고스란히 겹쳐지며 묘한 기시감을 만들어냅니다.

의상이 곧 언어가 되다

시각적 은유를 이야기할 때 의상의 색이 보여주는 변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두 인물의 감정선과 관계의 변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색깔이라는 언어로 꼼꼼하게 직조되어 있습니다.


아네스의 의상은 핏빛의 연대기입니다. 숲에서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살아있는 심장처럼 선명하게 펄떡이는 붉은색을 입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부장제 안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 선명했던 빨강은 점점 녹슨 붉은색, 탁한 적갈색으로 탁해집니다. 피가 마르고 테두리가 말라붙은 것처럼 육체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서서히 소진되어 가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급기야 햄넷이 죽고 난 후에는 자두색, 어두운 보라, 칙칙한 갈색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것은 마른 피의 색이자, 상처가 굳어가는 딱지의 색입니다.


반면 윌리엄의 의상은 완전히 다른 질감을 가집니다. 고향 집에 있을 때 그는 주로 파란색이나 탁한 잿빛 옷을 입습니다. 머리가 늘 구름 위에 떠 있는 사람, 회색빛 집안에서도 홀로 살짝 파랗게 붕 떠 있는 느낌입니다. 아네스의 붉은색에도, 집의 회색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그의 겉도는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죠. 런던으로 무대를 옮긴 후 그의 옷은 잉크와 종이를 연상케 하는 더 어두운 톤으로 바뀝니다. 철저히 머릿속에서, 글을 쓰는 인간으로만 살아가는 정체성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햄릿 공연에서 유령으로 등장할 때 그는 갈라진 진흙, 무채색의 거친 재질로 된 옷을 입고 무대에 오릅니다. 벗겨진 살갗과 금이 간 흙, 상실감과 죄책감에 파먹혀 껍데기만 남은 아비의 형상입니다.

함께 가족을 이뤘을 때는 두 사람의 색이 미세하게 섞여 들어가며 톤을 맞추다가, 아이의 죽음 이후 완전히 각자의 색으로 잔인하게 찢어집니다. 하지만 결말부 무대를 바라보며 아네스는 과거에 입었던 그 붉은 드레스를 다시 꺼내 입습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강렬했던 생기의 빨강은 아닙니다. 길고 어두웠던 애도의 터널을 지나, 아주 미약하게나마 다시 피가 돌기 시작하는 회복의 신호에 가깝습니다. 대사 하나 없이 오직 색의 변화만으로 두 사람의 거대한 서사를 써 내려간 치밀함이 경이롭습니다.

상처받은 아이들

윌과 아네스는 모두 폭력과 결핍이 자리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증오했던 윌, 새엄마가 차지한 집을 피해 자연으로 도망쳐야 했던 아네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렸던 건 어쩌면 각자의 상처와 결핍을 본능적으로 알아봤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시간은 그들을 가장 증오하던 부모의 모습으로 밀어 넣습니다. 윌은 결국 자신의 아버지처럼 가족을 등지고 떠나버리는 방관자가 되었고, 아네스는 혼자 집에 남아 모든 상실을 감당해 내는 외로운 어머니가 됩니다. 끊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어느새 반복하고 마는 인간의 지독한 비극을 영화는 덤덤하게 짚어냅니다.

죽느냐 사느냐

이 켜켜이 쌓인 모든 감정과 상징은 마지막 햄릿 공연 장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합니다. 자신의 끔찍한 상실을 예술의 소재로 가져다 썼다는 배신감에 아네스는 분노로 무대를 노려봅니다. 관객들 틈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겐 극의 흐름을 깨는 난동이었겠지만, 그것은 피를 토하는 어미의 처절한 절규였습니다.


하지만 연극이 진행될수록 아네스의 굳어진 표정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깁니다. 현실에서는 아들이 죽고 아버지가 살아남았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 운명이 정반대로 역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유령이 되었고, 살아남은 아들 햄릿이 죽은 아버지를 애타게 기억하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윌리엄은 스스로 죽은 아버지의 유령 역할을 맡음으로써, 현실의 참혹한 비극을 무대 위에서 뒤집어 죽은 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유령의 입을 빌려 토해내는 대사들은, 살아생전 바쁘다는 핑계로 끝내 아이에게 전하지 못했던 한 아비의 지독한 죄책감과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가 수없이 들어왔던 그 유명한 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완전히 다른 질감으로 가슴을 후벼 팝니다. 그것은 고상하고 철학적인 독백이 아닙니다. 자식을 잃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내 마음은 이미 자식과 함께 썩어 문드러졌는데, 남겨진 다른 가족들을 위해 이 끔찍한 생을 계속 꾸역꾸역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다 놓아버릴 것인가를 두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부모의 비명으로 들려옵니다.

구멍 너머로 사라진 환영

물론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렸다고 해서 현실에서 벌어진 상실이 완전히 봉합되거나 죽은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형체 없던 그 거대한 슬픔에 어떤 구체적인 모양을 만들어주고,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며 그 상실을 함께 견뎌낼 수 있게 해줍니다. 무대 위 햄릿의 손을 향해 아네스와 관객들이 일제히 손을 뻗는 순간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인간을 위로하고 연대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뭉클한 장면입니다.


아네스는 결국 무대 뒤 구멍으로 아이의 환영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봅니다. 도망친 줄만 알았던 남편이 사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가진 유일한 언어로 뼈저리게 아이를 애도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죠. 영화 내내 단단하게 굳어있던 아네스의 입가에 처음으로 번지는 아주 희미하고 쓸쓸한 미소는 그 어떤 오열보다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영화 햄넷은 위대한 예술의 탄생을 예찬하는 낭만적인 서사가 아닙니다. 그 위대함의 이면에서 돌이킬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이들에게 바치는, 조금은 늦게 도착한 장례식입니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괜찮다며 값싼 위로로 덮으려 하지 않고, 상실을 대체하지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묵묵히 응시합니다.


아마 살면서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억지스러운 치유를 강요하지 않고 내 안의 슬픔을 정면으로 들여다볼 시간을 허락해 주는 이 영화가 꽤 오랫동안 마음을 붙잡아 둘 것입니다. 화려하고 전개가 빠른 오락 영화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겠지만, 인물들의 미세한 숨결과 감각적인 연출의 결에 푹 빠져보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작품입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이라면 객석에서 어떤 감정의 파도를 겪으셨는지, 편하게 댓글로 이야기 나눠주시면 저에게도 큰 배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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