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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글리 시스터' 속 충격적인 상징들 해부

신데렐라 이야기는 어떻게 현대 사회의 잔혹 우화가 되었나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C253eT4EC8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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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신예 감독 에밀리 블리치펠트의 첫 장편 영화 '어글리 시스터'는 우리가 알고 있던 디즈니 버전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산산조각 내버리는 잔혹 동화입니다. 이 영화는 유리 구두의 주인이 된 신데렐라가 아닌, 그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발을 잘라내야만 했던 의붓자매 ‘엘비라’의 시선으로 동화의 어두운 이면을 파고듭니다.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 어린 욕망

주인공 엘비라는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The Ugly Stepsister', 즉 못생긴 의붓자매로 불리며 평생을 조롱과 멸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녀의 유일한 꿈은 왕자의 달콤한 사랑을 얻어 이 지독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충족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은 절박함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어느 날 왕자가 개최하는 무도회에 초대받게 되면서 엘비라에게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다시 말해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기 시작합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아름다움을 향한 개인의 순수한 욕망이 사회적인 강박과 기성세대의 압력 속에서 어떻게 뒤틀리고 광기로 변해가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어글리 시스터'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점프 스케어'가 없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공포는 갑자기 무언가 튀어나오는 시각적 충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한 인물의 내면과 육체가 서서히 파괴되어 가는 과정을 관객이 지켜봐야만 하는 심리적 압박감과 시각적 잔혹함에서 비롯됩니다. 쓸데없는 긴장감 조성 없이, 인물의 고통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들어 더욱 깊은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을 싫어하는 관객이라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지만, 잔혹한 묘사를 보기 힘든 분들에게는 다소 힘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지금부터는 영화의 주요 내용 및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위한 자기 파괴

영화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요소는 바로 '촌충의 알'입니다. 엘비라는 동생 알마에게 촌충 알을 보여주며 "이걸 삼키면 마음껏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라고 속삭입니다. 뱃속에서 촌충이 영양분을 모두 빨아먹게 만들어 살이 찌지 않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이는 마치 최근 유행하는 다이어트 약물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몸매라는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기생충을 스스로 몸 안에 들이는 행위마저 마다하지 않는 엘비라의 광기는 식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마저 억제하고 스스로를 숙주로 내몰게 합니다. 아름다움이라는 허상을 위해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기괴하고도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딸을 도구로 여기는 기성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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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라 혼자만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욕망을 부추기는 가장 적극적인 조력자이자 감시자로서, 어쩌면 이 영화의 진정한 빌런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딸이 왕자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엘비라가 왕자의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을 자를 때, 어머니는 딸을 말리기는커녕 직접 칼을 들고 딸의 발가락을 마저 잘라내 버립니다.


이 캐릭터는 자녀를 사회적 성공의 도구로 여기며, 정형화된 성공의 길에 들어서게 하기 위해 자녀의 개성과 본질을 서슴없이 잘라내는 기성세대의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식에게 강요하거나, 사회적 출세를 통해 이득을 보려는 생각으로 자식의 의지와 상관없이 몰아붙이는 행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반영합니다.

왕자와 유리구두

엘비라와 어머니가 그토록 갈망하는 왕자 역시 동화 속 낭만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외부에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실제 그의 언행은 오만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도회에 나타난 신데렐라에게 반한 왕자가 구두 한 짝을 단서로 주인을 찾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선포하는 장면 역시, 운명적인 사랑을 찾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구두는 왕자 자신, 혹은 사회가 정해놓은 획일적인 기준을 상징합니다. 그 기준에 자신의 몸을 기꺼이 맞추는 순종적인 여성을 아내로 삼겠다는 선언에 가깝습니다. 엘비라를 포함한 왕국의 모든 여성은 이 허상을 쫓기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양실조로 빠져버린 머리카락을 감추는 가발, 그리고 결국 잘려나간 발가락까지, 모든 것은 본질을 숨기고 사회가 요구하는 아름다움을 '연기'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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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기 어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인물은 엘비라의 어린 동생 알마입니다. 영화 중반, 알마는 자신이 초경을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숨깁니다. 이는 언니 엘비라처럼 '여성'이라는 범주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 또한 아름다움의 기준에 맞춰 재단당하고 억압받을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알마의 소극적인 저항은 이 세계관의 폭력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어글리 시스터' vs '서브스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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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시스터'를 보면서 칸 영화제를 뜨겁게 달군 코랄리 파르자 감독의 '서브스턴스'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두 영화는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이 어떤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는가라는 공통된 주제를 공유하지만, 그 표현 방식과 욕망의 결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입니다.


'어글리 시스터'의 엘비라가 겪는 압박은 어머니와 왕자로 대표되는 외부에서 오는 것입니다. 외부의 틀, 즉 구두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젊고 완벽한 자신의 복제품 '수'를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대체하려 합니다. 그녀의 압박은 나이 듦에 대한 공포와 젊음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비롯되지만, 핵심적인 갈등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전쟁, 즉 내부의 분열에서 폭발합니다.


식욕을 묘사하는 방식 또한 흥미롭습니다. '어글리 시스터'에서 식욕은 아름다움을 방해하는 죄악으로 억압의 대상이 됩니다. '서브스턴스'에서 식욕은 생명력, 젊음, 그리고 타인을 착취하는 행위에 대한 은유로 확장됩니다. 한쪽이 탐닉할수록 다른 한쪽은 말라가는 기생적 관계를 통해 욕망의 파괴적 속성을 극대화하며, 본체일 때의 폭발적인 식욕은 자해에 가깝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어글리 시스터'는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 개인을 우겨넣는 외부의 폭력을 고전 동화의 형식을 빌려 잔혹하게 그려냈다면, '서브스턴스'는 자기 혐오와 내부 분열이라는 현대적인 공포를 SF 바디 호러 장르로 풀어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과 인상 깊었던 연출

물론 '어글리 시스터'가 완벽한 영화는 아닙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신데렐라의 드레스가 찢겼을 때 갑자기 누에고치들이 나타나 옷을 수선해주는 연출은 그 전까지 유지해온 사실적이고 잔혹한 톤과는 다소 어긋나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차라리 엘비라가 자신을 추행하려던 드레스 판매자에게 몸을 바쳐 드레스를 얻어온다는 설정이었다면, 영화가 가진 잔혹한 분위기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촌충을 토해내는 장면의 시각적 충격은 대단했지만, 그 묘사가 더욱 기괴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마어마한 길이의 촌충을 입에서 뽑아내는 모습은 마치 마술사가 입에서 끝없는 테이프를 꺼내는 마술쇼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의 진짜 공포는 촌충이 부드럽게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간에 무언가에 걸린 듯 '턱'하고 멈추자, 그것을 억지로 힘주어 당기는 연출이 이어집니다. 이 순간 관객은 촌충의 빨판이 내장에 단단히 붙어 있어, 저러다 내장까지 함께 끌려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끔찍한 상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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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극 중에서 묘사되는 신데렐라도 마냥 착하기만 한 인물은 아닙니다.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사람에게 "슬픔의 깊이를 비교하지 말라"며 날카롭게 쏘아붙이거나, "내 빗은 쓰지 말라"며 은근히 상대를 깔보는 모습을 통해 그녀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런 설정이 있었기에, 그녀가 결국 파멸하는 이야기로 전개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물론, 인성이 좋지 않은 왕자에게 간택당했으니 그 결말 역시 파멸의 길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 소리를 이용한 불쾌감 조성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초반부, 방치되어 있던 신데렐라 아버지의 시신에서부터 들려오는 파리 소리는 그 자체로 불길함을 자아냅니다. 촌충알을 삼킨 후 계속해서 들리는 배의 꾸르륵거리는 소리는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을 조성하며 관객의 불안감을 극대화합니다. 혹시 영화 '에이리언'처럼 촌충이 배를 뚫고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에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영리한 연출이었습니다.

당신의 발에는 어떤 구두가 신겨져 있는가

"구두가 발에 맞지 않으면, 맞게 만들면 돼."


이 영화의 카피는 비단 동화 속 이야기만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구두를 들이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어글리 시스터'는 아름답고도 잔혹한 비극을 통해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이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비극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 관객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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