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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상징 해석, 결말 해석

평범한 가장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by 나이트 시네마
본문은 구어체로 작성된 리뷰 방송 대본을 AI를 활용하여 다듬은 글입니다.

https://youtu.be/MH3s55euMm8


박찬욱 감독이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프로젝트가 마침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1032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로부터 9분간의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베니스 기자회견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많은 사람이 고용 불안정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며, "어떤 시기에 만들어도 시의적절하다는 반응 덕분에 20년 동안 영화화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 말처럼 영화는 특정 시대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불안감을 건드립니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많은 블랙코미디 요소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 웃음 끝에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칼날을 숨기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어떻게 무력해지고 끝내 괴물이 되어가는지를 추적하며,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생존을 위한 변명이자 자기 합리화의 기제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을 냉정하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으로 담아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영화를 감상할 때, 심오한 메시지나 상징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직관적인 이야기 자체의 재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그런 저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이야기에 깊이 몰입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고, 극장을 나선 뒤 하나하나 장면을 곱씹으며 생각할수록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상징과 의미들이 풍성하게 다가와 더욱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림 같던 일상의 균열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25년간 제지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해온 유만수.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 미리, 두 자녀, 그리고 반려견들과 함께 너른 마당과 푸른 잔디, 야외 테이블과 바비큐 장비, 심지어 큰 온실까지 갖춘 그림 같은 집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고졸 학력으로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따고, 어릴 적 추억이 서린 이 집을 사서 몇 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가꾸며 그만의 작은 왕국으로 일군,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AI 도입과 자동화를 명분으로 한 대규모 구조조정의 칼날은 그의 완벽했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는 회사의 차가운 통보와 함께, 만수는 25년간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깁니다.


석 달 안에 재취업하겠다는 굳은 다짐은 1년이 넘도록 지켜지지 못합니다. 수많은 면접에서 거절과 조롱, 무시를 당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의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한정된 복직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느 날 아내가 무심코 던진 "저 사람은 벼락 맞아 안 죽냐"는 농담 한마디가 만수의 머릿속에 기발하면서도 끔찍한 아이디어를 점화시킵니다.


"저 사람이 사라지면, 그 자리는 내 것이 될 수 있다."


이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논리는 만수를 자신만의 전쟁터로 이끕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는 거야"라는 대사는 더 이상 단순한 비유가 아니게 됩니다. 마침내 만수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만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정원과 치통

영화 속 상징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만수라는 인물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영화 초반, 만수는 정원을 관리하고 분재의 모양을 잡는 데 몰두합니다. 무성한 가지를 다듬고 모양을 만들며 '질서'를 유지하려는 그의 행동은 직장, 가족, 사회에서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질서를 어떻게든 지키려는 내면의 욕망을 비추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가지치기나 분재의 모양을 바꾸는 것은 본래의 형태를 바꾸는 인위적인 행위입니다. 이는 자연스러움을 거부하고 억지로 자신의 뜻에 맞게 세상을 구부리려는 만수의 태도를 투영합니다. 급기야 만수가 나무 가지를 억지로 휘게 하다가 부러뜨리는 장면은, 그가 더 이상 '관리'의 수준으로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으며, 결국 파괴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다가왔습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만수의 정원은 그의 심리의 투영이다. 정원을 깔끔하게 유지하려는 집착은 질서를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의 삶도 균열을 맞는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만수가 끊임없이 치통을 참는 장면 또한 중요한 상징입니다. 치통은 처음에는 사소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불편함에 불과하지만, 해결하지 않고 방치하면 결국 일상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고통으로 발전합니다. 해고와 재취업 실패, 가정불화라는 만수의 상황이 바로 이런 치통처럼 그의 삶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치과에 가지 않고 고통을 참는 것처럼, 만수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외면한 채 그저 버티려고만 합니다. 결국 치통이 악화될수록 만수의 심리 또한 한계점까지 몰려 폭발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압박과 심문의 공간: 면접장과 '빛'의 상징

만수를 옥죄는 외부의 압박은 반복되는 면접 장면에서 극대화됩니다. 면접장은 본질적으로 권력의 게임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면접관과 피면접자라는 명백한 권력 불균형 속에서 만수는 한없이 위축되고, 체면을 지켜야 할 가장으로서의 자존감은 시험대에 오릅니다. 면접에서의 반복된 거절과 조롱은 그에게 깊은 심리적 압박이 되고, 이는 결국 극단적 선택의 밑바탕이 됩니다.


특히 영화에서 '빛'은 희망이나 계몽의 상징이 아닌, 인물을 압박하고 심문하는 불편한 진실과 권력의 시선으로 기능합니다. 첫 번째는 만수가 마트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중국인 사장과 면접을 볼 때입니다. 이때 유리창에서 반사된 강렬한 빛이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비추고 시야를 방해합니다. 이것은 면접관, 즉 권력을 가진 자가 만수를 낱낱이 뜯어보고 평가하는 '심문의 빛'입니다. 만수는 이 빛 앞에서 위축되고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합니다.


이 장면은 후반부, 아라가 경찰에게 취조받는 장면에서 그대로 반복됩니다. 경찰이 심문을 시작하며 커튼을 걷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이 아라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집니다. 결국 두 장면을 관통하는 '빛'은 희망이 아닌, '진실'을 캐내려는 권력의 상징인 셈입니다. 빛을 받는 쪽은 늘 심판받고 해부당하는 개인입니다.

불안의 대물림

만수가 겪는 불안과 압박은 그의 가족에게서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영화의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자폐 성향을 가진 딸 리원의 '반향어(Echolalia)'입니다. 반향어란 상대방의 말에 스스로 대답하지 못하고, 들은 말을 그대로 혹은 비슷하게 따라 하는 증상을 뜻합니다.


이는 만수의 모습과 묘하게 겹칩니다. 만수 역시 면접이나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손바닥에 키워드를 적어놓고 외워둔 말을 반복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오롯이 자신만의 언어와 생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한 만수는 더 이상 키워드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하며, 리원 역시 잃어버렸던 반려견 시투와 리투가 돌아온 후 자신만의 악보로 전곡을 연주해냅니다. 만수는 인간성을 상실한 끝에, 리원은 상실과 회복을 겪은 끝에 각자의 언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리원이 되찾은 내적 안정이 실은 만수의 타락을 통해 얻어진 것이라는 아이러니는 깊은 씁쓸함을 남깁니다.


아들이 절도를 저지른 후 어른들의 대처 방식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그들은 아들의 잘못을 꾸짖기보다 '없던 일'로 덮으려고만 합니다. 이는 이후 만수가 자신의 끔찍한 살인을 정당화하고 '없던 일'처럼 만들려는 모습과 정확히 겹쳐 보입니다. 작은 잘못을 덮으려는 이기심이 어떻게 더 큰 비극을 낳게 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선악과를 삼킨 남자: '뱀'의 유혹과 타락

내면의 불안과 외부의 압박 속에서 만수는 결국 위험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뱀'입니다. 영화 속에서 뱀은 여러 차례 등장하며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에덴동산의 뱀입니다. 만수가 그토록 공들여 가꾼 정원은 그만의 완벽한 '낙원'이었지만, "저 사람이 사라지면 내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악마적인 생각은 성경에 나오는 뱀의 유혹처럼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결국 만수는 살인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먹게 되고, 다시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시체를 묻은 땅에 심는 나무가 하필 사과나무라는 점도 이러한 해석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수의 행동은 뱀의 특성과도 겹쳐 보입니다. 그는 소리 없이 움직여 먹잇감을 덮치고, 점차 타인에 대한 따뜻한 감정을 잃고 차가운 생존의 논리로만 움직입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은 보통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만, 만수의 경우에는 선량한 가장의 허물을 벗고 괴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는 비극적인 재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생존의 논리, 폭력의 대물림: 아버지의 총

만수의 선택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생존의 논리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만수의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가져온 적군의 총입니다. 아버지는 "상대를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총에 맞는다"는 전쟁터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총을 간직했습니다.


이 총을 통해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존의 논리가 아버지에게서 만수에게로 대물림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만수의 아들이 절도를 저질렀을 때, 만수의 입을 통해 아들에게로 한 세대 더 대물림됩니다. 만수의 아들이 절도를 반성하기는커녕 공범인 친구와 그 후에도 여전히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면, 그에게는 잘못에 대한 죄책감보다 "어쩔 수 없었다"는 생존의 논리가 성공적으로 대물림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노노갈등'의 비극: 시스템에 잠식당한 개인

결국 영화가 그리는 세계는 "어쩔 수 없음"으로 가득합니다. AI 자동화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구조조정, 거대한 회사를 상대로 싸우기보다 같은 처지의 실직자들끼리 경쟁하는 노동자들, 가장의 실직에 따른 희생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하는 가족들.


이를 통해 영화는 '노사갈등'이 아닌 '노노갈등'의 구조를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같은 처지에 놓인 약자들끼리 한정된 파이를 놓고 싸우는 현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비극적인 단면으로 보였습니다.


만수가 계속해서 제지 업계에만 지원하는 모습도 의미심장합니다. "이 업계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내적 명제가 그를 스스로 가두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경쟁자였던 범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에게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주인공 자신도 '내가 다른 길을 택할 수는 없다'는 내적 명제를 반복하며 점점 더 좁은 길로 스스로를 몰아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아라가 구범모에게 던진 "실직당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직당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거야"라는 대사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로 다가옵니다. 이는 제지 회사 복직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구범모와, 끝내 최악의 선택을 하는 만수에게 동시에 던지는 일침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굴복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넘기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모든 것을 집약하는 마지막 장면: 벌목의 의미

이 모든 이야기를 집약하는 것은 바로 영화의 마지막, 무자비하게 나무들이 벌목되는 장면입니다. 이 엔딩은 그야말로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강력한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첫째, 이 장면은 영화 내내 만수가 강박적으로 자신의 정원을 가꾸던 모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자신의 작은 왕국을 세심하게 '통제'하려던 그는 결국 거대한 자본의 힘에 의한 완전한 '파괴'의 현장 앞에 무력하게 서게 된 것입니다.


둘째, 만수가 평생 몸담았던 곳이 '제지회사'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장면은 더욱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연, 즉 나무를 착취해 종이를 만들고 이윤을 남기듯, 노동자 역시 똑같이 착취하고 소모품처럼 버린다는 구조적 폭력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수 자신도 시스템에 의해 '벌목'당했고,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벌목'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비극적인 순환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대규모 벌목 장면은 회사가 단행했던 구조조정 과정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대한 전기톱이 나무들을 효율적이고 무감각하게 베어버리듯, AI와 자동화는 노동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제거해버렸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영화가 그 어떤 희망의 여지도 남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벌목 후에는 새로운 나무를 심는 '재조림'이라도 있기 마련인데, 영화는 오직 파괴의 순간만을 비춥니다. 스크린 속에서 베어져 나가는 나무들은 어쩌면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이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인간성일지도 모릅니다.

아쉬웠던 점들

물론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라와 범모의 집에서 살인 미수와 살인 현장을 목격한 만수가 갑자기 댄스 파티장에서 춤을 추는 장면 등 일부 감정선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또한, 아라의 내연남이 범모의 시신 처리를 너무나도 순순히 돕는 장면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살인에 가담하기보다는 그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만수가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그려졌는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쌓여왔던 많은 감정들이 폭발 직전까지 왔다가 아내 미리의 말이 트리거가 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곱씹어보면 '아무리 그래도 살인까지 생각하게 될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변명과 책임의 무게 사이에서

이러한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이 20년간 포기하지 않고 만들어낸 이유가 분명한 역작입니다. 고용 불안정이라는 주제는 어느 시대에나 유효하며, 특히 AI와 자동화가 가속화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고 공포스럽게 다가옵니다.


저와 같은 사기업에 다니는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고용 불안의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한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는지를 영화는 한 치의 타협 없이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만수의 선택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불편한 질문과 끊임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나 역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얼마나 쉽게 내뱉으며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편리한 변명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 사이에서, 선량함과 생존의 무게 사이에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깊은 여운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 다른 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자유롭게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시면 저 또한 배우는 마음으로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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