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으로
울산 현대자동차 상용 라인 > 찌라시 > 홍대 파티씬 > 인디뮤지션 > 웹에이젼시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왜 시작했지?"
그리고 이렇게 두 번째 글을 쓰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게 영 녹록지 않은 현실이죠? 물론 저의 시작에 비해 지금은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말이죠. 가장 기본이 되는 대우는 물론 시장에서의 위상, 더욱 낮아진 문턱 등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소위 이 바닥의 현실은 저와 동시대를 시작했던 많은 분들에겐 정말이지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느끼실 겁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아마도 질색팔색 할 분들이 널리고 널렸겠죠. "소위 라떼는 말이야...."로 눙쳐지는 또는 폄하? 되는 무리의 평가는 뒤로하더라도 말이죠.
정확히 기억하지만 저 위의 여정중 중간중간 말도 안 되는 에이젼시도 있었지만 그런 곳은 거르기로 합니다. 적어도 저의 디자이너 여정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친 경험들만 나열해본 것입니다.
"저의 디자이너로서의 출발은 순수미술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경험은 아니고 초등학교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미술부 활동을 했더랬습니다. 학교 이름까지 밝히긴 그렇고 제법 저의 학교는 지역 또는 전국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또는 미술대회가 있을 때마다 제법 유수의 성적을 거둬들이는 학교였습니다. 덕망 있는 미술대회에서 3 연속 단체상을 받아내기 위해 그렇게도 시계 초침은 흐르고 저의 팔근육과 엉덩이는 터져나갔지만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무언가에 집중했던 똥꼬 발랄했던 영광의 시절이었다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부산 송도공원에서 진행되는 무슨 사생실기 대회를 준비하며 미리 스케치와 현장 답사를 하던 때였습니다. 주말이었고 모든 게 정말 느리게 느리게 흐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세상은 아직 아날로그로 퉁쳐지는 콘텐츠들이 세상을 이끌던 시기였으니까요.
바닷가를 끼고 제법 높게 솟은 언덕의 공원이 지금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보면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서 그 평범한 아름다움과 여유가 강렬하게 하나의 이미지 또는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는 거겠지요? 그때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횟집 어딘가에서 라디오를 통해 박학기의 "향기로운 추억"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꼬꼬마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멍하니 슥슥 그려나가던 스케치를 멈추고 한창을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먼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던 듯 하지만 그건 생각이 안 나는군요. 쓸데없는 이야기로 빠졌는데 므튼 나름의 집중과 노력으로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온 저는 기어코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학교를 대표하는 예술공로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공고였던 학교를 졸업하며 현대자동차의 상용 라인에서 생산직으로 근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3년 가까이 말도 안 되는 보직만을 맡으며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3개월 만에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기적을 경험하며 주야간은 물론 그 시절 토요일도 오후 2시까지 근무하던 전설 속 시절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겐 그다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진 않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이게 내가 원하던 삶인가? 하는 원론적 질문에 빠지게 됩니다. 약 3년간의 근무를 뒤로 부산의 전문대에 진학을 합니다. 시각디자인과에서 디자인을 처음 시작하게 됩니다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1년 후 휴학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지금 돌이켜보면 참 시건방짐이 하늘을 찌릅니다만 그때 제가 느끼는 각 강의들의 커리큘럼이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94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서면 뒷골목 복개천에 늘어선 식자를 활용한 인쇄소들이 하나 둘 서서히 문을 닫던 시절도 그즈음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소위 아날로그의 장렬한 최후의 징후가 보이던 시기이기도 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