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소년운동과 오늘의 백지신문, 소년의 저항 역사
‘임쌍세(林雙世) 학생운동’
2026년 3·1절 독립유공자 112명 포상 명단에서 한 이름에 눈길이 멈췄다.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임쌍세 선생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어떤 일을 했기에 105년이 지난 뒤 그의 이름이 다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임쌍세 선생은 1903년 6월 3일 경상남도 진주 평안 473번지에서 태어났다. 1921년 3월, 선생은 ‘진주 소년회’ 동료들과 함께 3·1운동 2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준비하다 거사 전날 체포됐다. 등사판으로 직접 제작한 독립선언서 250장과 태극기 50장은 압수되어 재판정에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선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인정했다. 그 결과 일제는 이들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20년 8월 경남 진주에서 결성된 ‘진주 소년회’는 학교나 교회 중심의 평범한 모임이 아니었다. 1923년 3월 창간된 잡지 《어린이》 제1호에서 글방이나 강습소, 주일학교가 아니라 사회적 회합의 성격을 지닌 소년 조직으로서 진주 소년회가 조선 최초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1년 단체는 ‘진주 소년운동회’로 이름을 바꾸고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거사가 발각되면서 간부들이 검거되고 조직은 해산되었다.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은 이후 각 지역에서 소년단체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되고, 방정환과 김기전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소년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주에서도 1923년 ‘진주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되어 지역 소년운동의 흐름을 이어갔다.
백여 년 전 진주의 소년들은 등사판을 돌리며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면, 오늘의 청소년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고 있을까.
몇 달 전부터 뉴스에서 ‘토끼풀 신문’이라는 생소한 언론사 이름을 듣게 되었다. 이 신문사는 놀랍게도 중학생들이 만든 언론이었다. 토끼풀은 은평구 중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만든 지역 청소년 언론으로, 4개 중학교 학생 26명이 활동하고 있다. 학내 신문으로 출발한 토끼풀은 2024년 4월부터 매월 지면과 인터넷을 통해 발행하고 있으며 1,000부의 종이 신문을 4개 학교에 배포한다. 신문 이름은 닌텐도 게임에 등장하는 ‘토끼풀’이라는 언론사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토끼풀 신문은 초기 학교 지원금을 받는 자율 동아리로 출발해 학교 안 문제를 기사로 다뤘다. 2024년 연신중학교에서 외벽 페인트 공사가 진행되던 당시 현장에서 인부들의 무분별한 흡연과 미흡한 공사 관리 실태를 기사로 보도했지만, 학교 측의 요구로 기사가 수정되었다.
이후 토끼풀을 둘러싼 갈등은 다른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토끼풀 신문 2026년 3월 1일 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28일 신도중학교 측이 토끼풀 신문 약 300부와 기자 모집 포스터를 압수했다. 학교 측은 “모든 인쇄물의 배포를 금지한다”, “교칙 위반”, “제2·3의 학생단체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조치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언론 활동을 학교가 제한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토끼풀은 학교 측의 조치에 항의하며 같은 해 10월 발행된 17호 신문 1면을 백지로 발행했다.
신문을 압수한 학교 측은 아마도 질문하고 비판하는 아이들을 통제하기 어려운 존재로 느끼고 ‘순응과 규율’이라는 전통적 교육 문화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학교는 관리 책임을 져야 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위험을 피하는 가장 손쉬운 통제 수단인 ‘압수’를 택했으리라. 이러한 조치에 학생들은 위축되고 기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학교 측의 조치는 묘한 기시감을 자아냈다. 신도중학교가 밝힌 압수 이유였던 "제2·3의 학생단체 출현 우려"는 107년 전 일제가 임쌍세 선생이 속했던 진주 소년회를 해산시키며 드러냈던 공포를 떠올렸다. 1919년 3월, 일본은 조선 민중이 집단적으로 깨어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식민 통치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모습과 닮아있다.
그러나 토끼풀 신문은 일제의 처벌과 해산의 경험을 겪었던 진주 소년회와는 다른 반전을 맞았다. 신도중학교의 조치는 기성 언론에 알려지며 언론 탄압 논란으로 번졌다. 그 결과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후원으로 연대했고 삼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생 언론 자유 보장을 위한 서명에 참여했다. 교육청 학생인권센터가 직권조사에 나섰고, 마침내 학생 언론 자유 보장을 위한 규정이 마련되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널리 알리며 어린이 인권 운동을 펼친 소파 방정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아이를 미완의 통제 대상으로 보지 말고 인격적 주체로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런 존중의 시선이 있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이 그토록 원했던 문화 강국도, 안중근 의사가 꿈꿨던 평화도 가능해진다.
청소년을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눈으로 본다면 취재와 기사 작성뿐 아니라 편집, 재정 관리, 광고 영업까지 중학생 기자들이 직접 해내고 있는 ‘토끼풀 신문’을 오히려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기사를 준비하며 토끼풀 문성호 편집장에게 이메일로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 그는 107년 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던 임쌍세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답했다. “저희도 학교에서 신문이 압수되는 일을 겪었지만, 일제 치하의 어려움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그런 고초를 겪은 분들이 있었기에 저희도 독립 언론을 발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토끼풀 신문이 어떤 언론이 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그는 청소년의 목소리를 여과 없이 사회에 전달하고, 소외되는 청소년의 권리를 지키는 작고 단단한 언론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임쌍세 선생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3·1 독립선언서 공약 3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제는 조국의 독립을 외치려던 소년들의 등사판을 빼앗았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그들의 정신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정신은 오늘날 ‘토끼풀 신문’ 위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훗날 역사는 ‘백지 1면’을 발행한 토끼풀 신문을 그 이름처럼 한국 청소년 언론의 작지만 단단한 뿌리로 기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