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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Sep 12. 2021

낯익은 의령 아가씨

삼정 송림 맨션에 이사 온 후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큰오빠는 사업을 시작했다. 부산 화승 실업에 운동화 아웃 솔(outsole:신발 바닥 밑에 붙어 있는 창. 땅바닥에 닿는 부분을 이른다)을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를 차리게 되었다. 신 모라동에 1층도 아니고 지하도 아닌 곳에서 직원은 우리 셋째 언니, 작은오빠 그리고 우리 집에서 하숙하던 오빠 고향 친구 무환이 오빠 외에 직원이 3, 4명이 더 있을 정도로 꽤 규모 있게 시작했다.     


큰오빠는 화승에 납품하면서 생산관리과에 참한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숫기 없는 오빠는 마침 생산관리과의 오빠와 동갑이었던 과장에게 그 아가씨와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아가씨는 의령 출신으로 날씬하고 뽀얀 얼굴이 고왔고 일도 야무지게 했다. 큰오빠는 가난해서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어릴 적 명석하단 소리를 들었다. 허연 얼굴에 서구적인 또렷한 이목구비로 인물은 빠지지 않으나 어릴 적 심부름도 둘째 언니를 앞세워 가야 했을 정도로 유약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첫 만남 이후 데이트는 계속되었고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의령 아가씨도 큰오빠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의령 아가씨네 집에선 오빠가 큰아들에 동생들이 줄줄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했다. 특히 의령 아가씨 아버지는 결혼 전날까지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 아버지의 반대도 의령 아가씨의 큰오빠에 대한 사랑을 꺾을 순 없었고 그 의령 아가씨는 엄마의 첫 며느리가 되었다.      


엄마는 없는 집에, 그것도 동생들이 바글바글한 장남에게 시집오겠다는 처자만 있다고 해도 감사히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령 사돈댁은 우리 집보다 사는 형편이 나아서 부농에 가까웠다. 그때는 큰올케 언니가 오빠에게 과분한 사람인 것을 큰오빠도 우리도 알지 못했다. 과분하다는 것은 꼭 경제력만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빠에겐 없는 인생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단박에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해결책을 위한 빠른 판단력 그리고 연골이 닳도록, 발톱이 빠지도록 일하는 근면함이 언니에겐 있었다. 앞으로 닥쳐올 시련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언니가 시어머니와 같이 바위처럼 가족을 지켜낼지 그땐 아무도 몰랐다. 언니의 그 진면목은 잔인한 시간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집에서 도망치듯 어린 나이에 결혼한 첫째, 둘째 언니에 비해 큰오빠는 서른셋이란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엄마는 다른 자식들의 혼인 때와 마찬가지로 결혼에 호의적인 의사만 표현할 뿐 금전적으로 오빠를 도울 수도, 며느리와 연락해서 적극적으로 결혼 준비에 훈수를 둘 수도 없었다. 그즈음 50대 중반을 넘어서던 엄마는 공장 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만 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3월에 셋째 언니가 결혼하고 10월에 큰오빠가 결혼했다. 신혼살림은 화명동 18평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올케언니의 깔끔한 성격 덕에 살림은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어린 시동생들이 놀러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밥상을 차려주던 새색시 올케언니가 생각난다. 좁은 아파트였지만 신혼의 단꿈을 꾸던 화명동 집에서 얼마 살지 못했다. 화승 실업이 부도가 나면서 큰오빠의 사업도 끝이 났기 때문이다. 신혼집도 처분하고 큰오빠 부부는 삼정 송림 맨션 나동 310호로 꾸역꾸역 들어오게 되었다.      


큰 올케언니는 삼정 송림 맨션에서 첫 딸을 출산 후 아이를 엄마한테 맡기고 보험 판매일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올케언니는 둘째를 갖게 되었고 오빠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 둘째 아들을 낳았다. 부도로 돈을 막지 못하고 더는 버틸 수가 없게 되자 큰오빠 부부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부산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귀여운 애굣덩어리 채린이는 24개월이 안 되었고 잘생긴 포동포동한 승환이는 백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큰오빠네가 부산을 떠나는 아침이 되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어쩌꺼나. 어쩌꺼나. 저 어린것들을 어쩌꺼나.” 하며 엄마는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파트 뒷길로 내려가던 큰아들 내외를 눈물로 보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을 두고 가야 하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에 놓인 큰오빠와 며느리를 엄마는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 타들어 가는 가슴만 뜯었다.     


큰오빠의 사업 부도로 13년 동안 살았던 우리 집 삼정 송림 맨션도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엄마는 또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이젠 엄마에겐 자식보다 더 귀한 손자, 손녀가 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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