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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Oct 08. 2021

마침내, 투석

아버지한테는 미안하지만, 엄마도 우리 형제들도 아버지가 원하는 만큼 애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대신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나는 그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형제간의 친밀감을 느꼈다. 특히 손님같이 느껴지던 작은 올케언니는 그제야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그 전보다 말을 많이 하거나 관계 개선을 위해 특별한 시도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장례식장에 함께 머물며 조문객을 맞고 같이 밥을 먹고 조문객이 뜸한 시간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안주 삼아 술잔을 나누었을 뿐인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좁혀 있었고 나도 언니가 자세히 보였다. 아이가 없던 작은 오빠네는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큰아들 중현이가 생겨 모두를 놀라게 했다. 아버지를 미워했던 우리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중현이의 잉태를 두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만든 ‘필연의 선물’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나주 선산에 묻혔다. 배밭이 내려다보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작은 큰아버지가 묻혀있는 그곳의 아버지 자리로 돌아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묘 옆에 엄마의 가묘가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틈만 나면 당부했다. 절대로 아버지 옆에 묻히지 않겠다고. 엄마는 당신이 죽으면 화장하라고 했다. 그 이야기, ‘엄마가 죽는 이야기’는 아득히 먼 이야기라고 믿었다.     


10월 가을볕이 쨍한 어느 날 작은 오빠네, 셋째 언니네와 같이 엄마를 모시고 수원 경기도박물관에 갔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이곳저곳에 엄마를 끌고 다니며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차에서 잠깐 졸았는데 집에 도착해서 공동현관으로 올라가는 대여섯 개 되는 계단을 올라갈 때였다. 엄마가 선 채로 뒤로 쓰러졌다. 엄마 앞에 올라가던 나는 “쿵!” 소리에 돌아보았다. 엄마는 쓰러져있었고 언니 오빠들은 “엄마!” 하며 달려들었다. 우선 오산에 있는 종합병원에 갔다. 검사 결과 고관절 골절이었다. 그 상황에서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응급처치만 하고 구급차를 타고 다시 성빈센트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쓰러진 원인은 바로 요독(尿毒)으로 인한 쇼크였다. 의사가 애초에 경고한 대로 쇼크가 불시에 닥친 것이다. 고관절 수술을 하면서 엄마는 복막 투석을 위한 실리콘 관을 심는 수술도 같이하기로 했다. 뼈가 하나 부러진 다음에야 투석은 현실이 되었다.      


투석은 혈액 투석과 복막 투석 두 가지가 있다. 혈액 투석은 인공신장기를 이용하여 혈액 속 노폐물 제거, 신체 내 전해질 균형 유지, 과잉 수분 제거하는 시술을 말하고 보통 1회 4시간, 주 3회 병원에 가서 해야 한다. 복막 투석은 뱃속으로 통하는 실리콘 관을 삽입하여 투석액을 교환하는 시술을 말한다. 복막 투석은 집에서 하루에 4번 6시간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엄마는 혈액투석실에서 본 환자들의 검게 변한 낯빛과 팔뚝에 툭툭 불거진 혈관을 보고 기겁을 한 후 복막 투석을 선택했다. 한 달 동안의 입원을 끝내고 엄마는 새로운 투석 생활을 시작했다.     


복막 투석의 장점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새 투석액을 넣고 6시간 동안 배 속에 있던 투석액을 빼는 시간은 30분 정도 걸린다. 그러나 복막 투석의 단점은 배에 구멍을 뚫어 관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균이 침투해서 복막염이 생길 수 있다. 또 투석환자는 체중 관리를 잘해야 하기에 짠 음식은 피해야 한다. 염분이 증가하면 체수분도 증가해서 체중이 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하는 혈액 투석과 달리 가정에서 하는 복막 투석은 환자나 보호자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번 진료를 받고 나면 박스터(Baxter:미국 시카고에 본사를 두고 있는 글로벌 건강관리 기업, 신장 질환 관련 복막 투석 및 혈액 투석 치료를 위한 제품이 주된 품목, www.baxter.co.kr)에서 투석액이 집으로 배송된다. 한 달 치 투석액 상자를 신발장 앞에 쌓아 두는 것으로 복막 투석은 시작된다. 차가운 투석액을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 배에 연결된 실리콘 관과 연결해 2,000cc의 새 투석액을 넣고 6시간 뒤 아까 배 속에 넣었던 투석액을 빼내야 한다. 이때 2,000cc보다 조금 많이 나와야 하는데 적게 나오면 안 된다. 엄마는 투석액을 잘 나오게 하려고 다리를 떨거나 배를 계속 주무르기도 했다. 30~40분 후 엄마 배 속에서 나온 투석액 무게를 꼭 재야 한다. 그리고 매일 해야 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에 있는 출구 소독이다. 복막 투석 환자에겐 감염이 가장 무섭기 때문이다. 엄마는 투석만 하는 게 아니라 혈당과 혈압도 매일 확인하고 인슐린 주사도 맞아야 했기에 엄마를 모시고 살던 큰 올케와 특히 엄마랑 한 방에 지냈던 조카 채린이가 고생이 많았다.

한 달분의 투석액  <네이버 블로그 'T의 사라질 이야기>

투석을 시작할 때 의사는 우리에게 복막 투석 환자는 5년 정도 살 수 있다는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지금 생각하면 의사의 그 입을 꿰매고 싶을 정도로 무참한 말로 여겨지는데 그때는 사소한 사람의 사소한 말로 치부했다. 그러나 엄마만은 그 말을 중요한 말로 받아들였다. 엄마는 정말 투석을 시작한 지 5년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엄마와 우리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엄마의 식단 조절이었다. 투석환자에겐 독이나 다름없었던 컵라면과 커피 믹스를 엄마는 끊을 수 없었다. 복막 투석만으로도 부종이 생겨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사진들은 푸석푸석 부어있는 것들뿐이다. 그러니 더욱이 라면은 엄마에게 해로운 음식이었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쌀쌀해지는 아침에 엄마는 새우탕 컵라면을 먹고 입가심으로 커피 믹스를 마시는 것을 최고의 낙으로 삼았다. 왜 그 음식들을 먹으면 안 되는지 셋째 언니와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하곤 했지만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 걸 알았더라면 내 손으로 물을 끓여 라면을 대접하고 커피를 타 드렸을 것이다.   

  

또 복막 투석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가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한다고 했는데도 엄마에게 복막염이 잘 생겼다. 의사는 만약 엄마가 열이 나면 무조건 응급실로 오라고 했기 때문에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엄마가 열이 나면 119에 전화해서 성빈센트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엔 너무 놀라 혼이 빠졌지만 자주 가다 보니 기계처럼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 취객들의 난동과 각종 사고로 도떼기시장 같던 응급실에 친숙해져 갔다. 엄마와 응급실 다닐 때가 그래도 행복하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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