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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연길모 Apr 16. 2021

엄마를 찾아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고 엄마는 엄마라 불렀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어색한 일이었다. 부모님에 대한 애착의 크기는 호칭이 그 거울이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평생 술에 기대어 자신과 가족을 괴롭히다 17년 전 돌아가셨다. 미혼에, 3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길 능력이나 여유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술로 인한 폭력, 부모님의 심한 다툼, 가난에 시달렸던 우리 6남매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우리 형제들은 태어나 처음 만나는 평화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행복감도 잠시, 엄마는 신부전증으로 인한 투석 합병증으로 잦은 입원을 하셨고 급기야 의식은 또렷한 상태에서 대변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 닥쳤다. 엄마를 모시던 큰오빠 집은 맞벌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노인 요양 시설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평소 요양원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하셨기에 엄마를 먼저 안심을 시켜야 했다. 집과 가까운 곳에 모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엄마를 보러 갈 것이며 우리는 절대 엄마를 버리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한 후 며칠 뒤 엄마는 아예 정신까지 놓으셨다. 왜 갑자기 엄마가 쇼크 상태에 빠지셨는지 대학 병원에서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중환자실과 일반 병실을 오가며 한 달 반을 보내니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퇴원을 요구했다. 우리 형제는 의식이 없는 엄마를 요양원에 모셨다. 그로부터 5일 후 한마디 유언도 남기시지 않으시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혼자 자식을 여섯이나 키웠지만 어느 자식도 병든 엄마를 돌보지 않았고 자식이 여섯이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 겪은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와는 너무도 달랐다. 엄마의 죽음으로 나를 둘러싼 우주가 무너졌다. 육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엄마와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낸 불운아이자 가장 많은 엄마의 사랑의 수혜자이기도 한 나는,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것 같은 엄마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라졌다면 어디로 간 것인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래서 책 속엔 길이 있다기에 1년 동안 백여 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그런 후 책이 이끄는 대로 방송대 교육학과에 편입해서 철학, 교육학, 심리에 대해 공부했다. 졸업 후 불교 신자였던 나는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하게 된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면서 엄마는 내 세포 하나하나에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엄마가 사무치게 그립고, 내 불효를 몸에서 떼어 좀 더 자세히 보게 되자 후회와 그리움으로 가슴이 찢어졌다. 엄마를 위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것은 ‘엄마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글쓰기는 사랑하는 대상을 불멸화하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엄마의 삶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엄마를 불멸화하여 내 자식과 후손에게 위대한 ‘이정자 할머니’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강철 같은 할머니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딱 하루만 엄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신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아침은 엄마가 좋아하셨던 부산어묵 팍팍 넣은 라면으로 가볍게 시작하고, 점심엔 뜨듯한 온천에서 아픈 몸 지지게 한 다음 시원하게 때 밀어 드리고, 엄마가 좋아하신 해물 칼국수를 먹고 후식으론 믹스커피 두 봉지를 넣은 아이스커피를 드리고, 저녁엔 또 엄마가 좋아하신 매콤한 아귀찜으로 마무리하고 살갑게 손톱 발톱을 깎아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폭신하고 보드라운 엄마 팔에 머리를 대고 출렁이는 엄마 뱃살을 만지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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