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본 때는 OO가 되기 훨씬 전에, 어느 사회적 기업의 인문학 과정에 참가하고 있을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스물 여덟 때였군요.
아무래도 영화를 권해드리기만 하기도 그렇고, 또 결말을 말씀드리기도 그렇지만
이왕 영화 얘길 꺼냈으니, 그 시절의 영화평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OO들에겐 시사점이 있을 만한 영화니, 저처럼 영화 좋아하는 OO님들은 챙겨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스포일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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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1. 영화 <라쇼몽> 그날 저는 영화 토론을 마친 후 몇몇 분들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 흥미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분이 묻길“우리 과정의 인문학 팀장이 감상문을 써 오라고 말했는가 아닌가” 묻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집단 몰입이라도 된 걸까요? 그런 말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슨 말이었는지조차도 몰랐습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사실마저도 알 수 없었다는 것. 그저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말이 '진실'입니다. 지금도 알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감상문을 쓴다기보단 단지 습관 때문애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런 말은 듣지 못한 것 같네요.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은 젊은 무사 부부가 덤불 숲 속을 지나던 중 산적 다죠마루가 나타나, 부인을 겁탈하고 남편을 죽인 사건으로 벌어지는 재판을 다룬 영화입니다.
상식적으론 산적 다죠마루가 '죽일 놈'이겠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상식도,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건의 당사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만이 존재합니다. 무사의 부인, 산적 다죠마루, 목격자인 나무꾼, 무녀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죽은 무사의 혼, 모두가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진실이라는 건 정말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라쇼몽 효과(Rashōmon Effect)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2. 진실의 공백 속에서
‘사건’ 자체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현재’는 곧바로 ‘과거’가 되어버리듯, 진실은 일어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진실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제 ‘증언’, 곧 ‘말’만이 남습니다. ‘말’이란 일종의 환상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말들을 동원하더라도 ‘진실’을 완벽하게 되살려 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건에서 ‘진실’의 공백이 발생하면, 그 공간은 순식간에 온갖 ‘말’들로 채워지겠지요. 그러나 그 ‘말’이란 ‘진실’과 같은 힘을 지닌 것들입니다. <더 헌트> 마지막 장면에서, 누명을 벗은 루카스는 숲 속에서 습격을 받는 '환상'을 봅니다. 그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결백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고 믿는 '군중 심리'가 형성되었지요. 군중 심리의 특징 중 하나는 무의식 속에서 그것이 '감염'된다는 것입니다(귀스타브 르 봉, 1895).
3. 말.
<군중 심리>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군중 심리가 광범위하게 작용하면서 루카스 자신의 이성은 아니라고 말하나 무의식마저 집단적인 광기에 감염된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과거의 '말'들 속에서 '진실'에 최대한 다가가고자 하는 학문이 제 가장 젊은 시절 동안 배웠던 '역사학'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그 진행 과정에서 권위의 공백에 권위를, 권력의 공백에 권력을 불러왔습니다. 혁명은 신을 프랑스에서 몰아낸 후 다시 ‘최고 존재’란 이름으로 새로운 신을 모셔왔고, 왕(루이 16세)을 쫓아낸 후 이번에는 황제(나폴레옹)을 모셔왔습니다. 강제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졌으나, 한국사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대한제국 황제가 물러난 자리에는 일본의 ‘천황’이 자리를 잡았고, ‘천황’이 물러난 후에는 '천황' 같은 대통령들이 상당 기간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어떤 ‘공백’은 비슷한 힘을 지닌 것들로 반드시 메워지는 경향성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다시, ‘말’을 이번에는 자극이라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극이 크면 반응도 크고, 작으면 반응도 작지요. 진실이건 아니건 우리는 더욱 자극적인 ‘말’에 크게 흔들리고 부딪칩니다. 그 흔들림과 부딪침, 즉 혼돈 속에 에너지가 생겨나고, 그것이 우연히 한 방향으로 발산된다면, 레밍(나그네쥐) 무리가 우루루 바다로 뛰어들어 집단 자살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겠지요. 4. 사냥
"영화 제목에서 짐작했지만 토론에 참여해주셨던 많은 분들이 자신이 '마녀사냥'당한 경험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저도 영화의 주제를 사냥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겠으나, '마녀' 사냥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서운 아이(앙팡 테리블)' 클라라의 '불장난', 그리고 루카스가 클라라를 거부했다는 진실은 존재함과 동시에 사라지고, 진실의 공백 속에는 어떤 혼돈이 생겨나며, 그것이 클라라의 증오와 복수심을 통해 지향성을 지니게 되자 “클라라가 성 학대를 당했다!”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전 독실한 무교인데, 역사 전공 때문인지 덕분인지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기독교를 꽤나 진지하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창세기 1장과 2장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어, 빛이 생겨났다.”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창세기의 사상을 요약한다면 “말씀은 존재에 앞선다”로 말할 수 있듯이, 영화는 존재(진실)에 앞서는 말씀(클라라의 증언)으로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성당'이라는 시공간적 기호 속에서, 저는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 구조를 '사냥(HUNT)'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5. 십자군
유럽에서는 순결한 성모 마리아, 아기 예수의 이미지는 기독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도록 전통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여자-아이 클라라는 이러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순결함을 한 몸에 구현한 존재이며, 마치 성도 예루살렘과 같이 신성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는 ‘순결한’ 클라라가 ‘사악한’ 루카스에게 더럽혀집니다. 진실의 공백 속에 발생한 ‘신성 모독’, 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의 과잉'을 불러일으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폭력'이 발생하는군요.
1096년, 기독교적 전통에 충실했던 유럽인들은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lo vult)!”라는 구호를 외치며, '성지를 더럽히는 사악한 이교도’를 징벌하러 떠났습니다. 그것이 약 200년 동안 이어진 십자군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십자군은 최초의 원정에서 성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교도'를 처절하게 '응징'하는데 성공합니다. 한때는, 인류 전체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이면에 이교도에 대한 무한한 증오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즉, 루카스를 응징하고 클라라를 구해내는 것은 ‘신성’에 관한 종교적 전통, 그리고 ‘십자군 전쟁’과도 같은 열정, 이 양자의 융합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러한 구조 속에서 원장도, 상담가도, 테오 부부를 비롯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루카스의 ‘사악한’ 이야기를 무시하고, 클라라의 ‘신성한’ 이야기만을 자신들 입장의 유일한 근원이자, 동시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근거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6.크리스마스 선물
그러나 광기로 치닫는 마을 사람들의 정념, 그것은 이미 클라라로부터("아빠, 울어?"라는 물음이 자기 거짓말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죄책감은 아닙니까?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 모르겠다는 말은 대답의 회피라기보단, 비록 자기가 벌인 '똘아이' 짓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해도, 진실의 공백과 그 공백을 가득 채운 것들에 대한 의심은 아닙니까?), 그리고 테오로부터 비롯된 죄책감과 의심에 의해 사그라들기 시작하려 합니다. 그 직접적인 계기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슈퍼마켓에서 나온 루카스의 모습입니다. 장소는 이제 성당으로 이어집니다.
이 지점은 '이교도'를 사냥하던 예루살렘으로부터, 그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사랑스런 아버지(신)의 아들'이 되는,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갈릴리의 작은 구유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인류를 구원할 아기 예수가 태어난 전날 밤, 크리스마스 이브. 이 날은 제1차 세계대전 중 기적적인 휴전이 있었던 날이기도 하지요. 이브의 빛은 실제로도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루카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춥니다. 드디어 루카스의 면모가 드러나고, 테오는 그가 범인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마주보는 루카스와 테오가 서로를 바로볼 때, 이로써, 루카스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매다는 행위에서 피흘리는 루카스를 바라보는 행위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흘끗거리면서 이내 빤히 서로를 바라보며. 이어서 루카스가 테오를 구타할 때, 테오는 마을 사람들과 같은 ‘채찍질하는 자’가 아닌 ‘피흘리는 자’가 됩니다.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가는 예수에게 어느 죄수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저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피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일종의 전환점이었다면, <더 헌트>에서는 루카스의 피, 그리고 테오가 흘린 피가 광기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의 이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으로 보입니다. 또한 기독교가 이후 수 차례 박해를 거치고 난 후 로마, 나아가 유럽의 종교가 되어 교리상의 내재적 지향점이었던 ‘세계성’을 '복원'하려 하는 것처럼, 루카스 또한 몇 차례의 시련을 거쳐 테오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토론 때 다루어진 몇 가지 문제들에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 감상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