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4학년 국어 수업은 전기문의 특성에 관한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존경하는 인물의 일생을 다룬 책을 찾아오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소상히 안내하지 못한 내 불찰이었을까. 2009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선택한 위인전은 내 어릴 적과 다름없이 이순신, 세종대왕이 가장 많았다. 새침데기 미혜도 이순신을 가져왔길래 “너 해군사관학교 갈 거니? 장군이 되고 싶었는지 몰랐네?” 농담을 던졌다. 전기문에는 시대 상황, 업적, 가치관이 담겨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해서 시대 상황이 현재와 비슷한 인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했다. 근 100년 안에서 닮고 싶은 인물로 다시 가져오라고 했더니 축구를 좋아하는 진수는 손흥민 에세이를 가져왔다.
대학 다닐 때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장소는 도서관이었다. 당시는 교·사대 통폐합 반대 시위로 교대생들이 임용고시 거부 투쟁을 벌일 때였다. 혼자 공부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는데도 시위를 마치면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고시 공부가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철학서적이 꽂힌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 구경을 하러 갈 뿐이었다. 한 권 빼서 요리조리 살펴보고 휘리릭 넘기며 내용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부자가 된 것 같은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다. 소로우처럼 숲 속을 산책하고 독서와 사유를 즐기며 안빈낙도하는 삶을 꿈꾸었다. 통나무 속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햇빛을 가리는 존재일 뿐이다. 뭘 제대로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대학생인 내게 왜 알렉산더보다 디오게네스가 더 멋지고 세 보였을까? 소로우에 대한 관심으로 스콧 니어링,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소박한 밥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결혼하고 싶지 않았는데 책으로 만난 니어링 부부를 보며 결혼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렇게 나에게 존경하는 인물이란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을 삶으로 보여주며 속세의 셈법을 벗어난 사람들이다. 게다가 전기문으로 박제된 역사 속 인물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며 가까이에서 숨 쉬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다.
독서모임에서 <모멸감>을 추천해서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저자인 김찬호 선생님과 인연이 생길 줄 몰랐다. 그 책이 주는 강력한 끌림은 김찬호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선생님이 출강하고 있는 학교를 찾았고, 재작년 성공회 대학원에 입학했다. 첫 수업이 끝나고 신입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내 차례가 왔다. “저는 모멸감 때문에 이 대학원에 왔습니다.” 김찬호 선생님은 지금도 나에게 글을 쓰도록 용기를 주고 책을 쓰라고 격려해주신다. 김 선생님의 추천으로 2018년에는 6명의 교사들과 함께 책을 출판했다. 그렇게 김 선생님은 나에게 인생의 새로운 길을 안내해주는 분이다.
<카뮈를 추억하며>를 쓴 장 그르니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의 고등학교 철학 선생님이었다. 장 그르니에는 학생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하자 그들의 글이 지방 정기간행물에 실리도록 애썼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한 자신을 알 수 없다고 믿었던 장 그르니에는 출판이 하나의 자극제라고 여겼다. 카뮈는 스승의 책 <섬>으로 인해 자신도 글을 쓰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이 조그만 책을 처음 읽던 날, 길거리에서 몇 줄 읽다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고 아무도 없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 정신없이 읽던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섬>에 대한 카뮈의 서평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르니에와 카뮈는 서로를 존경했다. 15년의 나이 차이, 스승과 제자라는 틀거리와 상관없이 영감을 주고받고 사색을 나누는 관계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 사이가 무척 아름답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인생을 사는 모습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고 다양하며,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늘 강변한다. 그러나 말보다는 나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고 싶다. 존경하는 사람을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존경’한다는 것의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