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는 계약서를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야
USCPA 공부를 하며 회계 감사 과목에서 기업의 구조를 배우기 전까지 Controller가 무슨 일을 하는 직책인지 몰랐다. 부딪치며 배운 인턴 근무가 끝난 후에야 팀장님이 하셨던 말씀이 선명해졌다. “니나님, 자기는 계약서를 찍어내는 사람이 아니야. 자기는 Controller야.”
USCPA 학원에서 회계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은 회계법인은 물론 외국계를 포함한 다양한 조직에서 일하신 경험이 있다. 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외국계 재무팀은 영업팀을 견제하는 기능이 일반 기업보다 강해요.”
영업팀은 실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회계팀은 보수적으로 회계 처리를 한다. Conservatism은 회계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가령 미래에 이익이 발생할 확률과 손실이 발생할 확률이 같다고 해도 손실만 추정하여 인식하는 것이 회계다. 그래서 회계를 담당하는 Controller는 영업팀이 계약을 따내기 전에 수금이 가능한지 반드시 확인한다. 이것이 신용 승인이다. 큰 기업에서는 Credit팀이 따로 있기도 하다.
팀장님의 말씀은 이런 것이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내 역할은 단지 물류팀에서 전달받은 판매지시서의 장비명과 수량을 체크하고 Controller와 Sales manager의 승인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계약서 작성 업무의 핵심은 영업팀이 작성한 기안을 대리점의 신용과 재무적 정확성 측면에서 검토하는 일이었다.
‘영업팀을 견제’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와닿았던 것은 나 역시 매일 직위를 불문하고 영업 담당자들에게 전화를 걸며 때로는 아직 기안 작성이 미숙한 주니어들에게 재무팀의 관점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부속품에 기타 비용을 배부한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정확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팀장님의 컨펌을 받을 때까지 수정을 요구하는 일이었는데, 외근이 많은 영업팀 입장에서 문서 작업은 귀찮은 일인데다가 재무팀의 전화는 달갑지 않기 때문에 가장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었다.
사실 나의 정확한 소속은 재무팀이 아닌 Business Line Controlling팀이었다. 재무회계와 경영지원이 공존하는 부서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