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언덕길, 지금 생각하면 상당한 달동네에, 우리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명륜9길 29. 낮에는 길에서, 동아리방에서, 학생회실에서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하던 우리는 밤이 되면 그 곳에 모였다. 딱히 비밀 회의나 건설적인 토론의 장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방 2개와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다락방이 있는, 대학생 혼자 살기에는 꽤 넓었던 독채방. 그 곳은 나의 자취방이었다.
상경한 전라도 학생들을 위해 지자체에서 운영하던 ‘남도학숙’이라는 기숙사가 서울살이의 시작이었다. 아침 여섯시반이면 다같이 일어나 근처 공원에 모여 국민체조를 하고 밤 12시가 통금이었던 그 곳은 내가 꿈꾸던 ‘논스톱’에 등장하는 낭만적인 기숙사와는 크게 달랐다. 등하교 시간을 아껴서 학점 관리를 하겠다는 다소 낯간지럽고 뻔한 말로 부모님을 설득하고 학교 근처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취의 시작.
대학가 원룸 대부분이 그렇듯 그 집도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다. 친구들을 불러 밤새 술 마시고 놀고 나면 어김없이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문을 노크한다. 옆 방에 사는 고시 준비를 하던 형이었다. 적당히 좀 해달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불평하던 그 형은 그렇게 몇 번의 불평을 해도 크게 변하지 않던 나에게 어느 날, 잠깐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커피 한 잔 할래요?” 형은 차분하게 커피 한 잔을 내어주고는 맞은 편에 앉았다. “새내기죠?” 불편한 일로만 마주하던 사이였기에 이런 대화 흐름은 낯설었다. “얼마나 놀고 싶은 지,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 지 잘 알아요. 그래서 뭐라고 하면서도 마음이 안 좋았고요. 근데… 제가 올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요. 무슨 기분인지 아직은 잘 모를거에요. 그래도 조금만 노력해줄 수 있을까요?” 순간 많은 감정이 스쳐지나갔지만, 아마도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가장 컸다. 빨개진 얼굴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사를 결심했다.
학교 쪽문에서 30초 거리였던, 십 분 전에만 출발해도 수업에 지각할 일이 없던 집을 포기하고 나는 숨을 헐떡이며 10분은 걸어올라야 했던 혜화동 언덕길 끝 집을 선택했다. 거실과 주방이 분리되고 침실과 옷방이 있는 넓은 집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독채라는 점이 가장 좋았다. 이 집에서는 눈치볼 옆 방 사람도, 미안해할 고시생도 없었다. 집 값도 이전 집과 큰 차이가 없어 부모님께 죄송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희노애락이 가득할 바로 그 집에 정착했다.
그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요리 실력을 발휘해 안주상을 내었고 선후배동기들은 거실에 모여 깔깔대고, 통곡하고, 분노했다. 십분 거리에 옹기종기 자취를 하던 우리의 촌락에서 명륜9길 29 그 곳은, 마치 마을회관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 생일을 맞이하면 나는 기꺼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미역국이며 갈비찜, 나물들을 한 상 차려놓고 함께 축하했다. 고삐 풀리게 술을 진탕 마시고 여기저기 뒤섞여 자고 난 다음날에는 북어콩나물국과 계란찜으로 같이 속을 풀고 헤어지는 게 즐거움이었다.
학생운동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기까지 그 집은 3년 동안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던 공간이었다. 이후 군대를 가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회사 생활을 3년차를 맞은 지금, 나는 용산에서 혼자 살고 있다. 지금도 이따금 ‘니나노펍’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초대해 집에서 파티를 열곤 한다. 내 요리를 맛있게 먹고 한 잔의 술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좋은 사람들이 있어 참 행복하다. 그래서인지 그럼에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보내고 집정리를 하다보면 문득 그 집이 떠오른다.
누구나 대학시절을 돌아보면 추억할 만한 대표거리가 있다. 자취, 연애, 여행, 교환학생, 대외활동, 봉사활동 등. 나에겐 ‘사람’이 있다. 아지트에서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 한 때 같은 뜻을 가지고 동지라는 이름으로 같은 길을 나아갔던, 지금은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장 뜨거운 시절을 함께 했던 이 사람들과 훗날 가장 빛나는 시절도 함께하는 그 날을 그리며, 오늘도 난 요리를 매개로 사람들과의 시간을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