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트로이트>와 <허스토리>를 봐야하는 이유
재현, 영화는 '다시' '보여주기'를 사랑해
영화는 재현을 사랑합니다. 연출자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추려내 필름 안으로 끌어들이고 필름 안에 빨려들 어간 관객은 연출자의 입장을 따라가며 역사를 마주하게 됩니다. 각 나라마다 꾸준히 재현하려는 역사소재가 있습니다. 저는 한사람의 관객으로서 그런 역사물을 즐겨보는 편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 두편은 역사에 뿌리를 둔 영화 중에서도 빼어난 구석이 있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허스토리>와 <디트로이트>입니다.
<허스토리> 문제를 문제답게 만든 기념비적 순간의 재현
한국영화는 역사의 무엇을 재현하려 애썼을까요? 한국 같은 경우엔 식민지배와 전쟁을 다룬 소재가 즐겨 쓰이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벌어진 폭력과 희생을 영화제작 당시의 기준으로 재현하는 영화가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한국의 연출자들은 비극적 실화의 재현을 사랑하는 듯한데, 특히 집단으로부터 짓뭉개진 개개인의 사연을 조명합니다. 2010년대 들어선 식민지시대의 비극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는데요, 그 중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약진이 두드러집니다. 해마다 꾸준히 나왔습니다. <눈길>(2017)<귀향,끝나지 않은 이야기>(2017)<아이 캔 스피크>(2017)에 이어 <허스토리>(2018)로 이어집니다.
<허스토리>는 1990년대 '관부재판'의 법적분쟁을 재현합니다. 위안부 문제를 법적으로 인정받아,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게 만든 중요한 사건이지요.
비극에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지켜볼 때
위안부 문제는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현재진행형 역사문제입니다. <허스토리>가 앞서 나온 위안부문제를 다룬 영화와 남달랐던 건 '거리두기' 입니다. <허스토리>의 카메라는 인물에게 함부로 줌을 당겨 다가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영화의 무대를 과거로 옮겨 비극의 현장을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장면을 만들지도 않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희생된 여성들의 아픔은 철저히 '영화 속 현재'를 기준으로 재현됩니다. 현재를 기준으로 바라보려는 대상과 원근감을 유지하는 연출이 인상적입니다.
이전까지 나온 위안부 소재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떠올려보시지요. 영화가 제시하는 시퀀스가 너무 끔찍해서 도망가고 싶었던 적은 없으셨나요? 우리는 덕분에 피해자의 슬픔에 곧장 도달했지만, 재현된 역사의 비극이 너무나 처참하고 잔혹해 눈을 질끈 감아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너무 슬픈 나머지, 비극이 우리를 너무 무겁게 짓눌러 역사적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재현한 창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될겁니다. 카메라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렌즈의 힘으로 훨씬 생동감있게 보여주기에, 오히려 비극적 소재에 있어선 의도적으로 거리를 둬보는 겁니다. 카메라의 위력을 죽이는 게 관객 입장에서 훨씬 효과적인 연출기법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허스토리>는 비극적인 순간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지에 대해 사려깊은 고민을 보여줍니다. 비극을 담담하게 바라보려는 고민, 즉 연출기법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고 그것이 이 영화를 지지하게 만듭니다.
비극에 거리를 좁혀나가는 인물에 감정이입 할 때
먼저 주인공 얘기부터 할까요? 우리는 영화를 고를 때, 주인공 배우가 누군지를 보고 관람여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배우가 주는 힘은 대단합니다. 믿고 보는 大배우 '김희애'씨가 나옵니다. 화장품 광고에선 우아하며 주말드라마에선 가련하며 전반적으로 도시적인 이미지가 익숙한 연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허스토리>에선 기존의 연기에서 벗어나 시종일관 당차고 패기넘치는 부산의 거물사업가 역할을 맡습니다. 이 영화에서 김희애 배우는 익숙치 않을 연기를 200% 소화하며 관객입장에서 몰입할 수 있는 연기를 만듭니다. 믿고 보는 배우의 설득력 있는 변신은 영화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매력이 됩니다.
김희애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 '문정숙'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그것이 주인공의 사회적 성공과 단단한 태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숙이 '관부재판'에 엮일 수 밖에 없는 사건을 연달아 겪으며 정숙은 점점 변화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미지의 사건과 조우하며 변화하는 겁니다. 카메라는 비극과 거리를 두지만, 카메라가 담는 인물은 비극에 거리를 좁혀 나갑니다. 지난 세월에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기도 합니다.
배우의 탁월한 연기 덕분에 관객은 <허스토리>의 주인공이 조금씩 변화하며 성장하는 과정에 개연성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연기 하나만 믿고 봐도 좋을 것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충분히 그럴법하다고 존중하게 되는 연기 나무랄데 없는 역할을 소화해냅니다.)
<허스토리>인물은 대부분 정숙처럼 처음과 다른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일종의 성장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를 몸에 통과시킨 우리는 현실세계로 돌아옵니다. 우리도 정숙처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비극적 진실을 밝히는데 있어 재주껏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타인에게 힘을 건내줄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주인공의 전부까진 아니더라도 일부는 따라하게 됩니다. 잘 만들어진 연극이 관객에게 주는 가장 큰 힘은 모방욕구니까요.
<디트로이트> 인종과 계급의 교차로 디트로이트. 권력과 인권문제를 은유케 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와 지리를 몰라도. 딱히 미국의 영주권이나 여권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미국역사는 잘 와닿습니다. 해방 이후 60여년. 한국은 미국을 롤모델로 따라가 성장했습니다. 한국사회의 어떤 점은 미국사회의 어떤 점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것들의 차이를 분별하는 힘. 은유하는 즐거움을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 역사가 다른 대륙의 역사보다 흥미로운 까닭은 특유의 '역동성'에 있습니다. 미국 역사는 안정보다 기회를 중요하게 여기지요. 사람들은 돈냄새가 나는 곳을 따라가며 부유한 동네를 욕망합니다. 해서 아메리칸 드림은 가난한 남부에서 부유한 북부로 이동합니다. 산업화된 북부의 공업도시가 돈벌이에 보탬이 되겠노라 여긴 이들이 앞다퉈 북부로 향합니다. 미시시피강의 줄기를 따라 아메리칸 드림이 북상합니다. 남부에서 서럽게 살던 흑인들이 부지런히 북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지요.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선조들과 달리 자기자신의 의지를 따르며.
그렇게 디트로이트는 서로 다른 것들이 마구잡이로 교차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백인이나 흑인이나 똑같이 공장을 중심으로 벌어먹고 살지만, 백인과 흑인이 따로 어울리고, 부자와 빈자가 서로를 흘겨보는 구도가 생긴 거죠. 법과 제도 안에선 평등이 보장되는데, 실질적으로는 차별과 억압이 이뤄지게 된겁니다. 그렇게 서로 공존하기 힘든 두개의 진영은 갈등을 누적시킵니다. 갈등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언젠가 분출됩니다.
분노는 1967년 7월의 디트로이트 소요사태로 구체화 됩니다.화가 주목하는 건 바로 혼란 속에 분출된 분노가 어지럽게 뒤섞이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그때 당시의 풍경입니다.
그런데, 디트로이트의 풍경은 어쩐지 한국에 있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석이 있습니다. 인종차별만 다른 종류의 차별로 바꾸면, 개인적인 경험과 밀착시켜 환기되는 폭력이 다들 하나씩은 있기 때문입니다. 예시로 한국사회의 남녀차별은 페미니즘 이슈를, 계급차별은 금수저와 흙수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 안에서 각양각색의 폭력이 빚어지고 있죠. 최근 한국사회는 개개인의 의식이 세분화되고 뚜렷해지는데 차이와 차별을 민감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의 정치적인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배급되는 미국역사영화는 동시대 한국인에게 적절한 감흥을 불어넣습니다. 재구성된 미국사회의 풍경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풍경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게 포개진 공통점이 독자를 은유하게 하며, 그렇게 관객은 효과적으로 2010년대의 한국사회문제를 인식하게 됩니다. <디트로이트>는 그것을 가능케합니다.
역사영화에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끼얹다
<디트로이트>는 중반부터 스릴러물로 전환됩니다. 팽팽한 긴장감을 조장하는 장면으로 관객을 몰두하게 만듭니다. 흔히 서스펜스라고 말하죠. 관객은 스크린 밖에 있기에 사건의 진실을 다 알고 있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자신의 시선 밖을 볼 수 없으며,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희롱당합니다. 그런 영화속 인물을 보는 관객은 예측가능한 미래를 염려하며 영화에 과몰입하게 되며 커다란 감정을 고양합니다.
관객은 작중 인물이 인물이 가진 선과 악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니란 걸 미리 알고 있습니다. 폭력은 전적으로 상황이 빚어냈습니다. 폭력의 당사자 모두를 가엾게 여길 따름입니다. 갈구는 가해자가 딱하고 당하는 피해자도 불쌍한 상황을 허구로 재현해 그것을 관객에게 들이밉니다. 폭력은 나쁘다. 인권을 존중한다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폭력을 행사합니다. 무엇이 폭력을 발생하게 하는가. 폭력은 불가피한 일인가. <디트로이트>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실화를 재현하는 듯합니다. 폭력에 대한 판단은 고도로 복잡한 맥락과 관점을 아울러야 한다는 가설만 남기게 됩니다.
익숙한 문법의 역사영화가 지루해서 싫으신가요? <디트로이트>는 어떠실지요. 분명 색다른 감흥을 제공할 것입니다. 스릴러 장르의 요소를 역사영화에 넣는 경우는 드물었고, 녹여낸 요소가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습니다. 두시간이 넘는 긴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잘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실화에 대한 판단을 오늘날의 이슈로 끌어오게 만듭니다.
비극을 치유하는데 뭐라도 보태고자 하는 사람들이 연대할 때
두 영화 모두 비극적인 역사실화에 기반한 폭력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두 영화를 묶으면 폭력에 대한 섬세한 가설을 여럿 세우게 됩니다. 폭력은 마주하기엔 끔찍합니다. 폭력의 당사자가 되는 건 더더욱 끔찍할 겁니다. 어지간하면 다루고 싶지 않은 힘이자 고통스러운 힘입니다.
영화의 언어로 재현된 비극은 폭력을 그나마 매끄럽게 마주하게 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바 없는 상황이 사람을 무작위로 제압하면서 빚어지는 가해와 피해를 좀 더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하게 해줍니다. 비극을 통해 폭력을 탐구하면 폭력은 그저 불가피하고 예측불가능합니다. 탓하기가 애매합니다. 하지만 폭력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그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비극의 재현은 폭력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조율하려는 노력일 겁니다.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들고 비극으로 얻은 상처는 혼자 극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입니다. 비극적 사건으로 얻은 폭력의 치유는 타인과 연대하며 이뤄집니다. 타인과 보다 정치적인 의제로 나아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을 때 폭력으로 부터 얻은 상처가 아물게 됩니다. <허스토리><디트로이트>는 폭력을 잘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는 영화이고, 폭력의 상처가 어떻게 아물게 되는지 제시합니다. 폭력의 재현을 섬세하게 해준 덕일 겁니다.
그리고 잘 만들어진 재현은 비극의 당사자를 돕기 위한 연대의 시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허구의 재현을 잘 섭취한 관객은 실제로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탁월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허스토리>와<디트로이트> 두 영화를 묶어 봐야 할 결정적인 이유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