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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n 19. 2024

까치와 까마귀

   


5월의 이른 저녁은 기분 좋은 공기와 바람으로 

천천히 걷기만 하는 데도 풍요와 여유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혼자서 느긋하게 길을 걷다가 길가의 초록화단에서 흑백의 깃털 하나가 눈에 띄었다.

흑백의 깃털을 처음 보아 신기해서 폰으로 찍었다. 선명한 색의 대비 때문에 생경했지만 

누구의 깃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는 까치의 깃털이었다. 


   

보름쯤 전에 도로변을 걷다가 길 아래에 서 있는 참나무 아래 풀숲에 까치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왜 죽었을까? 못 먹을 것을 먹었을까? 언제 죽었지?" 까마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이 사라졌다. 두어 번 그 길을 지나치다 보면 

죽은 까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누군가의 눈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나 같은 사람처럼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아서 인지. 내가 웬만하기만 해도 "그 자리에라도 묻어줄걸... "

벌써 떠났을 새의 영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 날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느껴졌던 그곳으로 자연히 눈길이 갔다. 아, 까치가 없다. 참 '다행이다' 

싶었다. 누군가 그 까치를 치운 것이다. 감사했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 깃털을 보자 혼자 죽어간 까치가 떠올랐다. 새들은 누구나 혼자 죽어가겠지. 누군가 묻어주는 이 없이.

때가 되면 그저 떠나는 거겠지. 어디 새뿐이겠는가. 야생의 모든 생명이 다 그렇겠지.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나는 것이 지렁이나 나비, 코끼리가 다를 바가 있을까. 


그때 아파트 옆 전봇대에서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면서 산 쪽으로 날아간다. 

어릴 적 가끔 까마귀가 울고 지나가면 어른들은 “퉤퉤”하고 침을 뱉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아침에 까마귀가 울면 안 좋은 소식이나 동네에 초상이 난다 등으로 알려져 있다. 까마귀의 칠흑 같은 까만색과 우는 소리를 괴이하게 여겼다. 영물이다, 죽음을 불러온다는 등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불길한 징조로 여겨 사람들에게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는 언제부터 까마귀를 부정적인 영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까마귀를 대하는 태도는 시대마다 달랐던 것 같다. 우리의 전설 같은 역사에 등장하는 까마귀에는 삼족오(三足烏)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를 장식한 세 발 달린 까마귀다. 태양 속에 산다는 상상의 동물이기도 하다. 고구려 때까지는 삼족오(三足烏)는 국조로 여겼으며 전쟁 때 고구려 군사들은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옛날 중국 군졸들은 고구려군의 군기에 새겨진 삼족오를 보면서 중국에서 죽음을 알리는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를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 떼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공포를 심화시켰던 것이다. 삼족오 그림은 적군들의 죽음을 경고하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고구려의 심리전이었다는 가설도 있다.


우리도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영향으로 까마귀를 흉조라고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는 까치를 행복과 길상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까치가 울면 경사나 반가운 손님이 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까치의 깃털은 흰색과 검은색의 조화로움과 울음소리 또한 경쾌하여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올 거라는 기대감마저 들게 한다. 


정초에 까치가 울면 1년 동안 행운과 희소식을 전해준다 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길조라고 하였다. 까마귀와 까치의 모습이나 소리에 대한 비교는 어쩌면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일 가능성이 많다.

단지 까마귀의 색깔이 검고 소리가 불길하다고 흉조로 받아들인다면 까마귀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나라마다 까마귀나 까치에 대한 반응은 다르다. 까치를 길조로 여기는 반면 까마귀를 길조로 여기기도 한다.


오래전에 읽은 <까마귀 소년> 일본 그림책이다. 책표지마저 동화책이라기에는 거친 붓 터치와 색감의 검은 까마귀책은 아이들에게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외롭고 고달픈 삶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먼먼 산골에 사는 외로운 아이에겐 유일한 동무가 되어준 것은 까마귀 친구들이었다.

알에서 갓 깨나 온 새끼 까마귀 소리, 엄마 까마귀 소리, 아빠 까마귀 소리, 이른 아침에 우는 까마귀소리, 

마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우는 소리. 즐겁고 행복할 때 내는 소리, 고목나무에 앉아 우는 

소리....

까마귀 친구들 덕분에 아이는 외롭지 않았고 나중에 좋은 선생님 덕분으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일본은 까마귀(현조玄鳥)를 숭상했다고 하는데 그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한 대학에서는 까마귀가 40개 정도의 까마귀 언어를 구사한다는 연구도 있었다. 자동차를 이용하여 호두를 깨거나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등 지능을 가진 새라고 한다.


미국여성인 탱고는 에포크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까마귀가족에게 먹이를 주었다고 한다.  매일 먹이를 주고일 정한 시간이 지나자 까마귀들에게서 조약돌, 도토리, 동전 등의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먹이를 제공한 대가로 물물교환이라고 하였다. 여성은 가까이서 관찰을 해보니 7살 어린이 정도의 지능과 문제해결 

능력이 있으며 인간과 유사한 가족구조를 가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반포보은 (反哺報恩)이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어 보답한다는 뜻으로, 자식이 자라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함으로써 효를 행함을 이르는 말이다. 


오작교(烏鵲橋)는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를 만날 수 있게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은 어린아들도 알고 있다.


요즘이야 많이 변했지만 편견으로 말 못 하는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을 바꿀 필요가 있다. 까마귀가 울어서 초상이 나는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죽음을 알려주거나 위험의 경고하는 역할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우리는 까마귀가 가지고 있는 검정색을 죽음으로 상징하고 까마귀를 보면 죽음을 보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까치나 까마귀 둘 다 잡식성의 새이며, 초등1학년 정도 지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까치가 벌레를 잡아먹거나 하는 이로움도 있지만 요즘은 농작물의 피해를 주는 바람에 유해조수로 분류한다. 까마귀도 마찬가지로 이로운 면과 피해를 준다. 까치나 까마귀는 그냥 조류의 다른 한 종 일 뿐이고 저들의 소리로 내는 의사소통이나 표현일 뿐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매 순간 살아있는 것들이 하나 둘 태어나고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까마귀 한 마리의 죽음으로 그 인식의 순간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을 때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확실하지 않고 모를 때는 막연하게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알고 나면 괜한 두려움에 떨지 않았나 싶은 때도 있고, 실제보다는 느낌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알고 나면 두려움은 차츰 사라지고, 그냥 우리 곁에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다.

아주 가끔 날씨만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5월의 저녁이 있듯이, 무심하고 따분해서 미칠 것 같은 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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