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모험가-애국자-학살자 01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도 공포에 질린 표정은 똑똑히 보였다. 아니, 보였다기 보단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배 전체를 집어삼킨 불은 곧 날것의 공포를 지워버렸다. 비명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 역시, 불과 바다가 삼켜버렸다.
1502년 10월, 인도 말라바르 해안에서 메카로 향하던 대형 무슬림 순례선인 미리Miri호는 그렇게 사라졌다.
함대장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의 명령이었다. 다 가마의 항해에 동행한 서기, 토메 로페스Thomé Lopes는 얼굴을 돌리고 조용히 그의 선실로 내려가서 이렇게 기록했다.
'여성들이 아이들을 안고 금과 보석을 내밀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다 가마Da Gama는 이를 무시하고 학살을 지켜보았다... 그는 그들이 우리의 신을 모욕하고, 우리 선원들을 찢어 죽였다고 믿었기에, 그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으려 했다.'
– The Voyage of Thomé Lopes to India, c.1502
미리호는 보석과 사치품을 실은 배였기에, 금전적으로는 살려주는 편이 더 이익이었으나, 다 가마는 '공포의 효과'를 택했다. 장기적으로 항로를 통제하고 포르투갈의 명성을 세우기 위해, 이슬람 상인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날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제부터 인도양은 포르투갈의 질서로 돌아간다.”
다 가마는 타들어가는 미리호를 보며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4년 전인 1498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에게 보낸 서신을 그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땅은 향신료, 보석, 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무어인들이 이곳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교도들도 많기에, 우리의 신앙과 무역을 확립하려면 전쟁이 필요할 것입니다.”
향신료와 금, 무역로의 통제권은 전리품이었고, 인도는 경제적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점유되고 있었고, 그 누군가는 ‘무슬림 무역 네트워크’라는 유기적 조직력이었다. 다 가마는 자신의 역할을 단순한 탐험가도, 외교사절도 아닌 ‘칼을 든 상인’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목표는 교역의 문을 ‘연다’가 아니라 ‘쥐어뜯어 연다’는 데 있었고, 무력은 곧 협상의 한 방식이었다.
그날 밤, 그는 가족을, 포르투갈을 떠올렸다 -
대서양의 물결을 바로 내다보고 있는 고향 시네스(Sines),
수학, 천문학, 항해술, 지도 제작, 군사 전략을 배웠던 학교,
인도 원정의 지휘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세상을 떠나버린 아버지,
1497년 첫 인도 항해 때 함께 한 형 파울루Paulo...
1497년 인도 원정을 떠나는 선단과 리스본 부두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당시 대항해는 단순한 국가사업이 아니라, 국가 + 상인 조합 + 귀족 후원자들이 투자한 일종의 '국가주도 벤처 사업' 같은 규모였죠. 유럽에서 정향 1kg = 금 1kg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는데, 바스쿠 다 가마가 처음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주로 후추와 계피)만으로, 항해에 든 비용을 몇 배로 회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향신료를 싣고 돌아오면 수익 일부는 왕실과 투자자에게 배분되었지요.
하지만 원래 high return은 high risk인 법!
GPS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미지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니만큼 불확실성 또한 컸습니다.
일확천금에 대한 흥분과 '이제 가면 언제 오나~'의 불안이 함께했을 출발의 현장 - 구경 나온 사람들 저마다 꿈꾸고 생각하는 바가 달랐을 겁니다. 제일 오른쪽 아래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아 있는 여자는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부인이지 않을까요? 한편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들은 당당해 보입니다. 자기 돈이 들어갔지만, 가족의 목숨값은 아니었을 테죠.
당시 4척의 선박에 약 170명이 리스본을 떠났다. 2년 여 만에 귀환할 무렵엔 반 정도가 죽어버렸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렸고, 배는 2척으로 줄었다. 2척의 배를 모두 먼저 리스본으로 보내고, 그는 병이 든 형 곁에 남았지만 형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형을 아조레스 섬에 묻고서야 리스본으로 돌아온 다 가마는 왕실연금과 Dom이라는 귀족 칭호를 수여받은 것은 물론, 향후 항해에서 얻는 향신료 수익의 일정 비율을 보장받았다.
머릿속에서 달력을 넘기던 다 가마는 1500년을 떠올리며 쓴 물을 삼켰다. 1500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인도 캘리컷에 도착해 교역소Feitoria를 설치했지만, 아랍 상인들과의 충돌로 포르투갈인 53명은 잔혹히 살해당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고전 초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신 적 있나요?
공포로 길을 낸 제국의 사절
그리고 1502년 2월, 그는 다시 리스본을 떠났다.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함대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직함은 이제 Almirante do Mar da Índia (Admiral of the Indie 인도 제해권을 책임지는 제독)이었다. 단지 항해가 아니라, 전략적 군사 임무이자 무력으로 무역 질서를 재편하는 제국의 사절단이라는 것을 다 가마는 알고 있었다.
'이젠 외교가 아닌 무력이야. 미리호 사건은 선례가 될 것이다. 나는 제국의 검이야.'
2편으로 이어집니다.
참조.
https://military-history.fandom.com/wiki/Vasco_da_Gam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Tome-Lopes
https://en.wikipedia.org/wiki/Vasco_da_Gama
2차 인용 및 참조
Subrahmanyam, Sanjay. The Career and Legend of Vasco da Gam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Disney, A.R.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uese Empire, Vol. 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Newitt, Malyn. A History of Portuguese Overseas Expansion 1400–1668. Routledge, 2005.
The Voyage of Thomé Lopes to India, c.1502, Hakluyt Society edition (translated into English, 19세기)
Arquivo Nacional da Torre do Tombo (Lx. Portugal), “Chancelarias Régias, D. Manuel I, liv. 19”
Roteiro da Viagem de Vasco da Gama
https://archive.org/details/voyageroundworld01tayl/page/n15/mode/2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