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 왕국을 잇는 혼인

대서양의 모후, 필리파 드 랭카스트르 01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리스본 벨렝 지구에 서 있는 유명한 관광지 '발견기념비Padrão dos Descobrimentos'에 새겨진 인물들 대부분은 남성이다. 항해왕자 엔리크, 바스쿠 다 가마, 마젤란…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린 사내들 뒤쪽으로, 왕관을 쓴 여인이 보인다.

오늘날 연구자들은 그 여인이야말로 15세기 포르투갈 궁정의 문화를 주도하고, 미래의 ‘발견의 세기’를 준비한 주체적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필리파 드 랭카스트르(Filipa de Lencastre, 1360–1415),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의 왕비다.


4096px-Portugal,_Lisbon,_Padrão_dos_descobrimentos_(52594309260).jpg Portugal, Lisbon, Padrão dos descobrimentos, Lark Ascending, Public Domain Wikimedia
Filipa_de_Lencastre_-_Padrão_dos_Descobrimentos.png by Dennis G. Jarvis,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2.0 (CC BY-SA 2.0),Wikimedia Commons


빨간 장미의 가문에서 태어난 소녀

랭카스터House of Lancaster는 당대 영국 왕실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곧 다가올 장미 전쟁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태어난 소녀, 필리파 랭카스트르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정치의 냉혹한 공기를 마시며 자랐다.

아버지 존 오브 곤트John of Gaunt는 잉글랜드 왕실계의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하나였고, 어머니 블랑슈는 귀족 여성의 본보기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곧 어머니를 잃고, 거대한 가문의 이름을 짊어진 채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포르투갈의 독립을 외치는 왕

한편 바다 건너 포르투갈에서는 1383년, 페르난두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옆 나라 카스티야는 이 참에 포르투갈 왕국을 통합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귀족 및 지도자들, 특히 주아웅 드 아비스(João de Avis, 훗날 주아웅 1세)가 카스티야의 주장을 거부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주장하는 대표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1385년 8월 14일, 알주바로타 전투Battle of Aljubarrota에서 포르투갈 군대는 카스티야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한다. 이 승리로 포르투갈 내부에서 왕권과 독립을 확립하지만, 외교적으로 ‘카스티야의 재침’ 가능성이나 주변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위협을 억제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한 외국 동맹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잉글랜드!


왜?!

이 시기는 백년전쟁 Hundred Years’ War의 한가운데였고,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카스티야를 견제하고 싶어 했다. 포르투갈과의 동맹은 유럽 서남부에서 프랑스-카스티야 축의 확장 가능성에 대한 균형을 잡는 데 유리했다. (적의 적은 내 친구!)

그래서 두 나라는 1386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고,


Filipa_de_Lencastre,_Rainha_de_Portugal_-_The_Portuguese_Genealogy_(Genealogia_dos_Reis_de_Portugal).png 필리파 왕비의 초상, Public domain Wikimeida
Image taken from Genealogia dos Reis de Portugal. Originally published/produced in Portugal (Lisbon), 1530-1534
1530-1534년에 포르투갈에서 출판된 왕실 가계도 책에 나오는 초상화입니다.



두 왕국을 잇는 혼인

1387년, 잉글랜드의 필리파와 포르투갈의 주앙 1세는 결혼한다.

단순한 가문의 연합을 넘어서는 국제정치의 산물이었다.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은 모두 카스티야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고 있었고, 이 결혼은 두 왕국을 굳게 묶는 다리가 될 터였다.


리스본의 성당에서 혼례가 거행되는 날, 포르투갈 민중은 먼 나라에서 온 금발의 여인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폐하, 이 결혼은 단순한 동맹이 아닙니다.” 필리파는 신랑 주앙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두 사람의 선택이 두 왕국의 미래를 지탱하게 될 것입니다.”


주앙은 그녀의 눈빛에서 굳건한 의지를 보았다. 전장의 검과 정치의 책략으로 쟁취한 왕좌를 지키려면, 이 현명한 여인의 곁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그는 곧 깨달았다.


“왕비는 의연하고 품위 있게 리스본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단정했고, 언행은 절도 있었으며, 누구에게나 존경을 불러일으켰다.”

연대기 작가 페르난두 로페스는 당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후세의 기록은 종종 과장되지만, 이 대목에서 보이는 것은 ‘외교의 산물로서의 왕비’가 아니라, 이미 자신의 존재로 궁정의 분위기를 바꾸는 인물로 등장하는 필리파였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윈저 조약 Treaty of Windsor (1386)

1385년 8월 14일, 알주바로타 전투Battle of Aljubarrota에서 포르투갈 군대가 승리한 후, 포르투갈과 영국이 맺은 동맹 조약입니다. 공식 문서가 1386년에 체결되었고, 곧이어 1387년에 필리파 드 랭카스트르-주아웅 1세의 혼인을 통해 두 나라 관계가 더욱 공고해지죠.

조약의 주요 조항들은 상호방위mutual defense, 상호 우호friendship, 통상 및 무역 증진mercantile ties 등이었고, 이 영-포/포-영 동맹은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아직도 국제법상으로도 유효하며, 양국은 여러 국제적·군사적 협력에서 이 전통을 언급하죠.

영국 정부 역사블로그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국제 동맹 the longest continuing alliance in global history”으로 명시한답니다. 포르투갈 공영방송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외교적 동맹 O Tratado de Windsor, a mais antiga aliança diplomática do mundo”이라고 소개하죠.

https://history.blog.gov.uk/2016/05/09/historys-unparalleled-alliance-the-anglo-portuguese-treaty-of-windsor-9th-may-1386


https://ensina.rtp.pt/artigo/o-tratado-de-windsor-a-mais-antiga-alianca-diplomatica-do-mundo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완의 세계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