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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개가 넘는 자아의 시인

수많은 환상의 거울로 가득한 방, 페르난두 페수아 01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리스본 중심가의 카페 ‘아 브라질레이라A Brasileira’에는 청동으로 만든 동상이 하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잠시 눈길을 멈춘다. 동상의 주인공은 페르난두 페수아Fernando Pessoa (1888~1935) - 고요한 얼굴을 지녔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내면이 스며 있던 인물.

시인, 그리고 존재의 여러 층을 탐사한 내면의 탐험가,

삶의 외로움과 혼란, 사후 발견될 조각난 수많은 원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심오한 가치를 놓치지 않았던 예술가.


'Tudo vale a pena se a alma não é pequena.”
"영혼이 작지 않다면, 모든 것은 가치 있다.”


실패, 무명, 분열, 그리고 고독으로 점철된 생이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에 거대한 우주를 만들어냈다.


Estatua_de_Fernando_Pessoa.jpg Padagua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어린 시절 — 언어의 분열, 정체성의 씨앗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난 페수아는 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의 재혼으로 남아프리카 더반Durban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식민지 시절의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영어로 시를 썼다. 하지만 포르투갈어와 자신의 뿌리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Vivo sempre no presente. O futuro, não o conheço. O passado, já o não tenho.”
“나는 언제나 현재 속에 산다. 미래는 알지 못하고, 과거는 이미 없다.”


더반의 햇살 아래에서 페수아는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계 사이를 떠돌았다. 그리고 이 미묘한 정체성은 평생의 문학적 원동력이 된다. 영어는 그의 사유를 단련시켰고, 포르투갈어는 감정의 깊이를 담았다.



한 도시, 여러 인물의 사나이

1905년 페수아는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바이샤Baixa 지구의 카페 'A Brasileira’에서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회계사 보조라는 직업을 위해 도심 사무실로 향하는 리스본의 페수아.

리스본의 거리는 그에게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내면이 스스로를 탐색하는 무대가 되었다. 페수아는 비교적 평범한 직업(회계사 또는 사무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문학 안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인 작가적 실험을 감행했다.


그는 포르투갈어, 영어, 그리고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들며 시와 산문을 썼다. 포르투갈이 제국시대의 영광을 지나 ‘모더니즘’과 정체성의 위기를 마주하던 시기, 페수아는 그 흐릿한 경계선 위에서 글을 써 내려갔다.


“Sinto-me múltiplo. Sou como um quarto com inúmeros espelhos fantásticos.”
“나는 복수의 존재로 느껴진다. 나는 수많은 환상의 거울로 가득한 방과 같다.”


Fernando_Pessoa_Heteronímia.jpg Joan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2.0


페수아가 문학사에서 가진 가장 큰 특징은 “헤테로님heteronym” (이명/다중자아)이라는 개념이다. 단순한 필명이 아니라, 각기 다른 생애와 철학, 문체를 지닌 인격체들을 창조해 그들 이름으로 글을 썼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는 “나란 존재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얼마나 분열되었는가” 같은 문제를 문학 안으로 끌어들였다.


“Nós nunca nos realizamos. Somos dois abismos -- um poço fitando o céu.”
“우리는 결코 스스로를 완성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개의 심연 — (하나는) 하늘을 응시하는 우물.”


완성하지 않는다, 실현될 수 없다는 말.

‘두 개의 심연’이라는 이미지. ‘우물’과 ‘하늘’이라는 대비.

- 페수아에게 자아는 하나의 단선적 존재가 아니라 내부에 또 다른 깊이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위로 향하는 시선과 아래로 향한 심연 — 그 사이에 페수아와 수많은 자아들이 있었다.


"Não sou nada. Nunca serei nada. Não posso querer ser nada.”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되고 싶을 수도 없다.”


이 절망의 고백은 동시에 시작의 선언일지도 모른다 - '아무것도 아닌 자’만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혹은 '모든 것을 꿈꿀 수 있다'는 역설적인 선언.





부캐? 헤테로님(heterônimo)?

하나의 인물 안에 여러 자아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깊이와 목적은 다릅니다.

요즘 연예인들이 말하는 ‘부캐’는 자신의 일부를 확장하거나 변주한 또 다른 연출된 자아입니다. 같은 인물의 또 다른 버전, 혹은 상황에 맞는 연기 캐릭터에 가깝죠.

페수아의 헤테로님 은 “또 다른 인격체”입니다. 페수아는 그들을 단순한 가명으로 쓰지 않았고, 생년월일, 필체, 사상, 말투, 심지어 별자리까지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그들’이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시를 비평하기까지 했지요. 예를 들어, 알베르투 카에이루Alberto Caeiro는 “자연과 감각의 시인”, 리카르두 헤이스Ricardo Reis는 “고전주의적 사유와 절제의 시인”,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는 “현대 산업사회의 감각 과잉을 노래하는 시인” - 전부 별도의 인생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또 부캐는 주로 즐겁게 자신을 확장하는 놀이의 성격이 강합니다. 현실의 피로함이나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른 나’를 시도해 보는 거죠. 페수아의 헤테로님은 정체성의 분열과 철학적 고뇌의 결과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의 인격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를 느꼈고, 그래서 여러 인격을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자유로운 변장’이라기 보단, ‘존재의 병리학적 결과’였던 셈입니다.


어쨌거나 부캐 문화도 사실 '정체성이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는 사회적 자각의 산물이긴 합니다. 직장인, 크리에이터, 부모 혹은 자식, 게임 속 아바타로서의 나 등등 — 모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작은 헤테로님’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요. 이런 점에서 페수아는 디지털 시대의 선구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가 20세기 초에 썼던 문장이 있는데, 아주 현대적이죠.


“Viver não é necessário; o que é necessário é criar.”
“사는 것은 필수가 아니다. 필수적인 것은 창조하는 일이다.”


페수아가 그토록 집착했던 “나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체험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입니다.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Fernando-Pessoa

https://www.britannica.com/art/heteronym


https://acpc.bnportugal.gov.pt/espolios_autores/e03_pessoa_fernando.html


https://www.instituto-camoes.pt/activity/centro-virtual/bases-tematicas/figuras-da-cultura-portuguesa/fernando-pessoa

https://pt.wikiquote.org/wiki/Fernando_Pessoa

https://www.visitlisboa.com/en/lisbon-stories/4-pessoa-route

https://www.casafernandopessoa.pt/pt/cfp/visita/museu/poemas-e-textos-escolhidos/portugues/bernardo-soares/livro-do-desassossego-3-amo-pelas-tardes-demoradas-de-ver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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