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로 가는 길은 언제나 묘한 설렘을 동반한다. 행정구역상 이름은 '사천시'로 통합된 지 오래지만, 사람들의 입술 끝에는 여전히 '삼천포'라는 지명이 더 달콤하고 애틋하게 감긴다. 늦가을의 바람에는 분명 짠내가 섞여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훅 끼쳐오는 그 냄새는 단순한 바다의 향이 아니라, 수천 년간 이 바닷가 사람들이 견뎌온 삶의 체취 같았다.
사천 시내를 지나 삼천포항에 다다르자,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출렁이는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부두 한쪽에 세워진 「삼천포 아가씨」 노래비를 지나 노산공원 입구에 섰다.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러, 그 아래 펼쳐진 남해의 푸른 물결과 누가 더 깊은지 내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 언덕 끝에, 요란한 치장 없이 단정하게 들어선 하얀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국 현대 서정시의 거목, 박재삼 시인을 기리는 '박재삼문학관'이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바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나 끈질기게 몸에 감기는 이 바람의 촉감은 박재삼의 시를 닮아 있었다. 그의 시는 첫눈에 강렬한 이미지를 던지기보다, 서서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긴 시간 파문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나는 그 파문의 근원을 찾아 천천히 문학관의 문을 열었다.
박재삼(朴在森) 시인은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네 살 때 고향인 삼천포로 돌아와 그곳의 바다와 골목을 터전 삼아 자랐다. 문학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하는 기록들이다.
그는 평생 '가난'과 싸워야 했던 시인이었다. 중학교 진학조차 어려워 삼천포 여자중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소년. 그 소년에게 바다는 낭만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의 현장이자 어머니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강이었다. 시 「추억에서」를 보면, 생선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장터의 옹기전 근처에서 파장 무렵까지 생선을 팔다 돌아오는 길의 풍경이 절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진주 장터 생어물전에는 / 바닷물보다도 맵싸한 아롱지는 눈물발이 있는가 /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그의 시에서 '눈물발'은 단순히 슬픔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난을 정면으로 통과해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영혼의 결정체다. 박재삼은 자신의 가난을 부끄러워하거나 사회를 향한 분노로 치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가난한 삶의 비루함을 '보석'으로 닦아내는 길을 선택했다. 전시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빛바랜 사진 속 청년 박재삼의 얼굴에는 불안함 속에서도 맑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고통을 노래로 승화시키려는 시인만의 고집이었을 것이다.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육필 원고와 창작 노트들은 시인의 사유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 수없이 긋고 다시 쓴 흔적들은 언어 하나를 고를 때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지 짐작하게 한다. 한 전시대 위에 적힌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봐라"라는 문구는 박재삼 시학의 정수다.
그는 사물을 대할 때 결코 명령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고, 그 사물의 내면에 깃든 슬픔과 기쁨을 자신의 가슴으로 옮겨온다. 그의 대표작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시인은 노을 진 강물을 보며 '울음'이 타오른다고 표현했다. 강물이 붉게 물드는 시각적 현상을 내면의 청각적 고통으로 연결한 이 기막힌 전이는, 사물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문장이다.
박재삼의 시는 1960~70년대 참여시와 모더니즘의 격랑 속에서도 꿋꿋하게 한국 전통 서정의 맥을 이었다. 그는 서구의 화려한 이론을 쫓는 대신, 김소월과 서정주로 이어지는 한국어 특유의 가락과 정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전시된 시집 초판본들의 노란 표지는 그가 지켜온 그 순수한 서정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마치 시의 숲을 지나는 기분이다. 벽면마다 새겨진 그의 시구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그리움은 바람을 타고 와서 내 마음에 닿는다." 이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돌리니 창밖으로 노산공원의 소나무들이 바다 바람에 일제히 몸을 누이는 풍경이 보였다. 자연과 시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2층 전시실은 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쓰던 안경, 낡은 만년필, 투병 중에도 놓지 않았던 원고지들이 놓여 있다.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시인의 육성 낭독은 담담하고 소박했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그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지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편안하면서도, 끝에는 알 수 없는 먹먹함을 남겼다.
특색 있는 공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시인이 그토록 아꼈던 '따뜻한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공간일까. 아이들이 책을 읽으며 창밖의 푸른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박재삼이 꿈꿨던 평화로운 세계의 실현처럼 보였다. 시는 죽은 활자가 아니라, 이렇게 다음 세대의 눈동자에 맺히는 빛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문학관은 말하고 있었다.
문학관 밖으로 나오니 공원 언덕 위에는 시비(詩碑)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그중 「천년의 바람」이라는 시비 앞에 섰다.
"천 년 전의 바람이 / 오늘날에도 불고 있는 것처럼 / 나의 마음도 그렇게 흔들리고 있다"
박재삼에게 바람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만날 수 없는 인연을 잇는 매개체이자, 인간의 변치 않는 본질적인 고독을 상징했다. 그가 평생 노래한 '한(恨)'은 원망이나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고통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그 고통조차 사랑의 일부로 수용하는 '정화된 슬픔'이다.
노산공원 아래로 펼쳐진 삼천포 바다는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다. 저 바다는 시인의 어머니가 이고 왔던 생선 대야 속의 바다였고, 시인이 가난한 연애를 하며 바라보던 눈물의 바다였을 것이다. 시인은 이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고 "사랑은 다시 오는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깨달음은 허무가 아니라, 붙잡을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더 소중히 여기라는 따뜻한 당부로 다가온다.
문학관을 떠나기 전, 내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친 문장은 "詩 창작은 답이 없다. 무조건 써라"라는 시인의 말이었다. 이는 비단 시를 쓰는 법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조언이기도 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매일 자신의 하루를 써 내려가야 한다. 박재삼이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끝내 펜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삼천포의 늦가을 바람은 이제 차가워졌지만, 마음속에는 온기가 가득 찼다. 박재삼의 문학 기행은 화려한 볼거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착한 눈물' 하나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멀어지는 삼천포항을 뒤로하며, 나는 오늘 받은 위로를 한 편의 시처럼 간직하기로 했다.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기보다, 시인의 말처럼 '따뜻한 가슴'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기를. 그리움이 바람을 타고 올 때, 그것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맞아낼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박재삼이 남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이제 내 마음속에서도 잔잔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 강물은 슬픔을 씻어내고, 끝내 사랑이라는 드넓은 바다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때
이 강물에 설레이는 어두움이
강을 덮은 것은 아니렷다
다만 덮였다 뿐이지
덮인 듯 하다 뿐이지
수면(水面)에 비치는
조각 달은 몇 조각이 되었으랴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 같아선 그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때
강물이 돌아 돌아
어디로 가겠느냐는
덧없는 넋이 저물어 돌아
어찌할 수 없는 일들만
되풀이 하며 살고 있는
가을 강가에
작가소개:
박재삼(1933~1997)
일본에서 태어나 4살때 사천으로 이사 왔습니다. 서정시인으로, 1955년 『현대문학』에 「정적」이 추천되어 등단했습니다. 그의 시는 한국적 정서인 ‘한(恨)’과 자연, 그리고 일상 속 슬픔을 절제된 언어로 노래하며, 맑고 고요한 서정으로 평가 받습니다.
대표 시집으로 『춘향이 마음』, 『햇빛 속에서』, 『천년의 바람』, 『꽃은 푸른 빛을 피하고』 등이 있으며, 한국 현대시에서 전통 서정의 맥을 가장 순수하게 계승한 시인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박재삼 문학관 :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박재삼길27
시인의 고향 마을에 자리한 문학관 입니다.
2008년 개관하여, 시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기리는 상설 전시와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건물은 내부에는 시인의 친필 원고, 초판 시집,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시인의 육성 낭송과 생전 인터뷰를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험 공간에서는 관람객이 직접 시를 쓰거나 낭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문학관 뒤편에는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비롯한 대표 시 구절들이 돌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푸른 남해와 들녘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 속에서 박재삼 시인의 서정 세계가 고요히 살아 숨 쉬는 공간 입니다. 월요일은 정기휴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