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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젊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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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nderer Dec 22. 2021

시절인연

영화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일본 영화 특유의 강점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일상의 재조립이지 않을까. 꾸준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을 기워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독창적인 세계를 펼쳐내는 일본 만화와는 별개로 실사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힘은 일상 속에 있다. 학창 시절의 관계, 사회 초년생이 마주하는 사회, 가정을 이루고 나서의 권태처럼 큰 틀은 엇비슷한데 소소한 구성이 바뀐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사랑의 과정에서 기쁘거나 슬픔이 가득 찬 순간의 이야기보다는 날짜가 기억나지 않는 날의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 감성으로 자아내는 감정들이 참 별미다. 특정한 장면보다는 그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느끼는 일본 영화는 거기서 출발한 생각의 가지가 일상에 닿는다.


 사토는 우연히 페이스북 친구 추천에서 전 여자 친구를 발견한다. 알 수도 있는 사람 목록에 뜨는 전 여자 친구의 이름. 아이를 안고 가족들과 함께였다. 이름을 보고 나서부터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여유 있는 모습은 마감에 쫓기는 모습으로 변해가고 그 시기를 함께했던 사람들을 마주한다. 바쁜 나날을 견디게 해주는 건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애정들이었다. 시시한 일화들, 말실수와 에피소드는 사소한 소품들에 담겨있다. 지금은 핸드폰 사진첩에만 담아두는 추억들이 예전엔 핸드폰 배터리에 붙여지곤 했다. 개성이라고 표현할 것이 구태여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나오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사토는 플립 차트 만드는 일을 한다. TV 뉴스 화면에 뜨는 CG 자료들을 만든다. 수없이 만들어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일. 정작 뉴스에 올라오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깊게 새겨질 것들이지만 말이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어느 시점에 뭘 좋아했는지 정도는 가뿐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무겁다. 망각을 표현할 때면 다들 시간이 빠르다고 말하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 반대 같다. 오히려 너무 무겁고, 너무 느려서 지금 삶의 패턴과 안 맞는 게 아닐까. 체감하는 시간과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에 이격이 발생하면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물의 현상이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것인데 사토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그 말이 생각났다. 할 줄도 모르는 일에 뛰어들고, 처음을 함께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꿈과는 관계없는 일에 붙들려 관성으로 일하는 과정. 그리고 2020년에 되돌아본 기억들. 그때의 일들은 어떻게든 벌어졌을 일이었을까? 어리고 미숙했던 나였기에 실패하는 일이었을까? 우연히 마주친 옛 친구와의 재회에서 그런 익숙한 생각들을 하게 된다. 어떤 선을 넘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던 때를 지나고 관성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는 시기. 어떤 시간은 버텨야 하기에 많은 걸 잊어버리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소소한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영화다 보니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분위기와 환경에 젖어드는 이야기에 가깝다. 회상하는 시점은 명확하고 과거의 기억은 추억일 뿐이니까. 시간을 거슬러 무언가 바꾸는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기억하려는 영화다. 극적인 사건에서 오는 재미보다는 뻔한 공감대를 건드린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렵다고 설득력이 떨어지진 않았다. 영화를 보는 관객 각자의 추억이 이야기를 보정한다. 서툴었던 과거의 내 모습과 그때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이나 감정들이 겹쳐 보인다.


 에게 과거의 기억 언제나 희미했다. 그래서 항상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단편적인 인과관계로 채우는 기억은 맛이 없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어도 나에게 과거는 어렴풋한 분위기로만 남아있다. 마치 책처럼, 지시문이 있는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애써 상상하지 않으면  세계는 사라진다. 잃지 않으려면 뭔가를 적어서 주문을 거는 것도 좋다. 노트의  앞장을 명언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노래 가사를 적는 것처럼.


사진 출처 : IMDB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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