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웃고 있으면 선한 인상이 전해지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가족은 물론 할머니와 할아버지, 세 고모, 삼촌과 함께 한 집에서 살았다. 공사장 이곳저곳을 다니며 일했던 삼촌은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일고여덟 살 정도의 나를 목마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고는 했다. 동네 하천 산책로를 걷기도 했고, 만화방에서 나를 옆에다 두고 만화를 보는 일도 많았다. 미숙아로 태어나 병치레를 자주 했던 내가 걱정됐던지 힐끔 쳐다볼 때마다 보이던 삼촌의 미소는 맑고 환했다. 라면이나 오징어 같은 주전부리를 자주 시켰기에 옆에서 조금씩 얻어먹는 재미도 있었고. 시간이 지나 고모들이 결혼하고 삼촌이 나가 살면서 우리는 수도권 각지에서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다. 우리는 예전만큼 친밀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나는 특히 삼촌 소식을 궁금해 했다.
내가 대학원에 다닐 무렵 삼촌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삼촌이 위암 말기를 비롯한 합병증으로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나를 무척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대학원 수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던 당시 나는 병문안 일자를 며칠 미뤘다. 설마 며칠 차이로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있었겠지. 그러던 주말 새벽 전화가 걸려 왔다. 삼촌의 생이 이제 곧 저물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부모님과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중환자실에는 배가 산처럼 부푼 삼촌이 호흡기에 의존해 누워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난 삼촌의 한 손을 꼭 잡고 울었다. 그리고 내가 왔으니 꼭 눈을 떠 나를 봐달라고 말했다. 간호사들은 복수를 빼내는 등 치료를 진행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였다. 삼촌은 급격히 소멸하고 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새벽 2시가 지날 무렵 의사가 내 아버지를 따로 불렀다. 난 병실 밖에 나가 그 대화를 엿들었다. 호흡기와 진통제에 의존해 고통스럽게 버티고 있던 삼촌은 이제 그나마도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의사는 산소호흡기 포기 동의서를 장남인 아버지에게 내밀었고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다 서명에 동의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의사가 직접 병실로 들어와 호흡기를 뗐다. 잠시 후 병실 밖에서 서성거리던 친척들에게 공표했다. OOO 씨는 몇 월 몇 일 새벽 2시 50분경에 사망하셨습니다. 몇몇은 울고 몇몇은 고개를 숙였다. 난 병실로 들어가 차가운 병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병실 내 다른 환자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는데, 그 소리 때문인지 삼촌은 마치 깊은 잠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깊은 잠. 내 인생 처음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죽음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온 얼굴에 나타났던 당신의 미소, 목마를 탔을 때 느껴지던 당신의 단단한 어깨가 떠올랐다. 함께 먹었던 주전부리들, 언제나 나를 걱정하며 쓰다듬던 손과 깊고 맑던 눈빛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