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효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선 Oct 05. 2021

무지개 너머로 부칠 편지

「효원」 132호



너의 눈을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해서.



안녕? 

널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건넨 첫 마디였다. 그때의,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너는 정말이지 여리고 작았다. 그야말로 인형 같았다. 너무 진부한 표현인가. 하지만 ‘인형 같았다는’ 표현 말고는, 당시의 감상을 내보일 말이 없다. 생명이 박동하는 생명체라기보다, 고귀한 누구인가가 마법을 후-하고 불어넣어 탄생한, 그런 존재 같이 느껴졌다. 그런 존재를 어떻게 막 대할 수 있겠나. 조금이라도 생채기를 입으면, 그 틈으로 신비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말아 움직임을 멈출 것 같았다. 마법이 깨지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나는 너를 그토록 세게 안을 수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나만 품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다른 가족들도 너를 조심스럽게 다뤘던 것을 떠올리자면, 그들도 너에게 비슷한 맥락의 마음을 느꼈던 것은 분명하겠지.


‘우리 강아지 키워볼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 어느 날 이른 아침, 엄마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돌이켜보자면, 너를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했던 것은 참으로 마법 같은 일이었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어리실 적 큰 개에 물린 경험을 하시고는 줄곧 개를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당시의 나는 잘 몰랐으나, 이내 큰누나와 함께 인터넷을 뒤졌더랬다. 털이 가장 안 빠진다는 이유 하나로 푸들을 검색했다. 수많은 갈색 솜뭉치들이 서로의 엇비슷한 얼굴들을 내비쳤다. 무심하게 스크롤을 내리던 중 한 강아지가 눈에 띄었고, 우리는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날로 낯선 생명을 집으로 데려왔다. 그게 너다.


우리가 너를 낯설어했듯이, 너에겐 우리가 한없이 낯선 존재였을 테지. 이제까지는 맡아 본 적 없던 냄새들에 둘러싸인 채 어디론가 실려 가는 것. 처음 세상에 나와 빛을 보고는 쭉 함께했던 익숙한 감촉의 온기가 더는 너를 안고 있지 않았음에 불안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너는 고맙게도, 단단히 모은 내 허벅지 위에서 곤히 잠이 들었더랬다. 지금에 와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봐도, 잠든 너를 품고 집으로 돌아왔던 길이 기억나지 않는다. 너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창밖을 쳐다볼 틈도 없었기 때문이겠지. 그때 너에게서 전해지던 옅은 무게감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짙게 남아있다.


“얘 이름은 소망이에요.” 소망이. 지금 너를 그 이름으로 불러 봐도, 넌 나에게 다가오지 않겠지. 아마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눈알만 도륵도륵 굴릴 것이 뻔하다. 낯선 파동을 가진 그 음성이 너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우리는 너를 만나러 가기도 전에 네 이름을 정했었다. 내가 어디서든 부르자면 네가 반갑게 반응하는 그 이름. 이제 와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가족에게 네 이름은 처음이 아니다. 내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사람 나이로 치면 네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의 나이쯤이 되겠지. 너의 이름을 가진 강아지 하나가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게 사뭇 잘해주지 못했었던 기억 때문일까. 굳이 너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우리 가족은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일종의 다짐을 했던 것 같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키우자며.


그런 우리의 소망이 이뤄진 것인지, 너는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 강아지들이 으레 그래하듯, 아무 곳에나 똥을 누고는 사방팔방 뛰어다녔다. 이제야 나기 시작하는 이빨들이 가려운지, 앞발을 올릴 수 있는 곳에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씹어댔다. 그러자 누나들은 차라리 씹을 거리를 하나 내주는 것이 낫겠다며, 인상을 찡그린 채로 너에게 손가락을 물리곤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너는 통 깊게 잠들지는 못하더라. 낮 동안 그렇게 뛰어다녔으면 밤에는 몸이 노곤해질 법도 한데 말이지. 밤마다 낑낑거리며 우릴 찾고, 마루를 총총히 밟는 폭신한 발자국 소리가 밤새 울렸다.


곁에 어미가 없으면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사실을 얼마간 뒤에 알게 되었다. 무슨 제목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책에서 나온 말을 나는 충실히 이행했더랬다. 솜 필통에 손목시계를 넣고는 네 머리맡에 두는 것이었는데, 시계의 째깍거림이 꼭 어미의 심장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고 했었나. 반신반의하던 것도 하루, 필통 곁에 바짝 붙어서는 규칙적인 숨을 내쉬는 너를 보게 되었었지. 


잠든 너를 바라보고 있자면 참 행복했다. 까만 눈동자가 번져 넘친 듯, 감은 눈에는 역시나 같은 색의 눈꺼풀이 있었다. 호두나무 색 털 뭉치가 조금 부풀었다가 가라앉길 반복하고, 가슴 한복판에 유난히 돋아난 하얀 털이 콧바람에 흔들린다. 마찬가지로 하얀색의 발끝이 조금 불규칙하게 떨릴 때는, 뛰어다니는 꿈을 꾸나보다-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네 가슴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콩닥임과 나의 심장 박동이 맞아떨어질 때면, 하나의 공통점을 찾았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네가 깰까 싶어 차마 건드리지도 못한 채 몇 십 분이고 마주 엎드려있자면,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릿속의 잡념들을 지울 수 있었다. 너와 나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관념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만이 존재 할 뿐이었다. 곰돌이 인형 필통 속의 손목시계는 그를 증명이라도 하듯 째깍째깍…. 


그렇게 가족이 되어갔다. 네 생일이 10월 31일이었기에, 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할로윈 데이가 하나의 의미를 품게 되기도 했다. 여러 번의 할로윈이 지나갔고, 넌 점차 아기 티를 벗기 시작했다. 그 시절의 기억은 나에게 갈색 털과 하얀 이빨로 남아있다. 너는 배냇털 뭉치들을 여기저기 흩뿌렸고, 알게 모르게 빠진 유치 앞에 앉혀져 우리의 축하를 받았다. 그때 너는 어떤 생각을 하며 마주 웃어줬던 것일까. 단지 널 둘러싼 이들이 웃고 있었기에 따라서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었던가. 털과 이빨이 빠지는 것 따위는 너에게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달랐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너와 나는 서로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성장해갔다. 여자 친구와 커플로 맞췄던 손목시계는 네 것이 되었고, 넌 내 필통에 네 냄새를 묻혀주었다. 내가 벽에 새겼던 줄들을 점진적으로 올려갔던 것과, 아무런 무리 없이 들어가던 앉은뱅이책상에 언젠가부터 머리를 꽁하고 박는 너는 어딘가 닮아있었다. 아주 아기 때의 너는 발자국 소리조차 나지 않아 우리에게 자주 발을 밟히곤 했었지. 그래서 달아줬던 방울은, 네 발자국이 점차 자박거리는 소리를 가지게 되면서 더는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런 과정을 직접 마주하고 있자면 가슴 한구석에서 몽글거리는 감정이 솟구쳐 올라서는, 내 피부에서도 너의 것처럼 곱슬한 털들이 나오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그런 꿈을 꾸기도 했었고.



안녕!

하고 네가 인사를 건넨다. 그 인사가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꼬리를 흔들고, 소파 위에 누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이내 내 다리에 몸을 바짝 붙여오는 너를 만지고 있자면, 우리가 며칠 정도는 떨어져 있다가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으면서.


그런 말이 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난 왜 항상 출처를 까먹는 걸까?), 강아지에게는 하루가 꼭 3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하루라는 텀만 두고 만나도 반갑기 마련인데, 넌 그래서 적은 시간 사이에도 나에게 반가움을 드러내는 것인가. 조금의 시간만 지난 후에도, 그 기억이 꼭 어제의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그렇게 생각하자면 내가 너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네가 인사를 건네는 횟수, 그게 하루 세 번이 훌쩍 넘는 날이 더 많다는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반가운 것은 아침 인사지 싶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볼에서 느껴지는 너의 복실거림은 나에게 꼭 아침 인사와 같다. 난 그 느낌이 좋다. 밤 동안에는 엄마 곁을 지키던 네가, 내 문이 열렸을 때 나에게 찾아오는 느낌이 좋다. ‘이제 아침이야!’라고 내게 말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팔을 조금 긁어 이불을 들추게 만들고는, 너의 등 전부를 내 옆구리에 가져다 대는 과정 전체가 좋다. 엄마 곁에서 잔뜩 데워진 네 몸의 온기가 나에게까지 전달되는 느낌. 잠결에 너를 쓰다듬으면 찾아오는 반가움의 입맞춤도, 그 뒤엔 어김없이 볼에 느껴지는 복실함도, 나에겐 어느새 아침 해를 맞이하기 전의 의례처럼 자리하게 되었다. 너와의 깊은 인사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는 만성 비염을 앓게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행복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 우리 가족의 일상 중에서, 네가 빠진 광경이란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가족 구성원들 모두의 스케줄은 네 배꼽시계보다 중요하지 않다. 먹을 것을 보면 환장하는 너를 배려해서, 네가 밥을 먹을 때를 맞춰 식사를 차리는 것이 더없이 자연스러워 졌다. 혹시 네가 뒤적거릴까 봐, 바닥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게 됐다. 아 참, 이것과 관련해서는 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하나 있다. 흡연자라면 어느 때고 피할 수 없는 담밍아웃, 그것이 네 덕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친구와 농구를 하고 있었던 어느 날 저녁, 누나가 무서운 말과 함께 보내온 사진 속에는 네가 있었다. 잔뜩 파헤쳐진 담뱃갑 옆에 앉혀져서는 말이다. 부주의하게 바닥에 두고 나갔던 가방을 뒤졌던 것이겠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품었던 한 치의 원망은, 나를 보고는 살랑이는 꼬리를 보고 사르르 녹아버렸더랬다. 


나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조심한다. 아마 우리 가족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어떤 사고 회로를 거쳐 알게 된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으나, 언제부터인가 네가 화장실 바닥에 배변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공간이 그런(?) 활동을 하기 위한 장소라는 것을 어떻게 유추해냈을까. 한 주먹도 안되는 작은 머리,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호두알만 한 두뇌. 그 작은 살덩이가 어떤 형식의 전기 신호를 처리하고, 또 그런 결론을 도출했을지를 생각하면 손발이 간지러워진다. ‘혹시 넌 천재가 아닐까?’ 하고. 아무튼, 따끈한 똥과 발바닥으로 인사를 나눴던 경험 몇 번, 화장실 문을 열 때면 바닥에 이물질이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똥을 발견하고는 너를 부르기도 전에, 너는 이미 냉큼 다가와 꼬리를 흔든다.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럴 때마다 ‘안녕! 나 잘했지!’하고 인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한 내 착각일까.


지치지도 않고 건네는 네 인사, 그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지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네가 먹는 사료 한 알을 손에 들고는 유심히 바라본 적도 있다. ‘여기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하고 말이다. 그 기억을 돌이켜 보자면, 그 한 알을 바라보며 마주 앉았던 너의 모습도 떠오른다. 내가 그것을 주었던, 어찌 보자면 당연한 수순의 기억과, 내 손을 훑고 간 너의 촉촉함까지도.



안녕.

이 말은 정말이지 하기 싫었는데.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안녕이 있겠지만, 마지막을 알리는 안녕에는 꼭 마침표가 들어가더라. 키보드에는 다른 문장부호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말이지. 이들을 제쳐두고 굳이 이 점을 찍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물결표의 일렁임을 띈 작별을 고하고자 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 글을 적는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마침표를 찍는 내 가슴은 정말이지 미어질 것만 같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머릿속으로 어렴풋하게 그려보는 끝과, 글로써 구체적인 형태를 지니게 된 마지막은 그 느낌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너에게서 보이는 마침표의 전조는,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이라도 적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걸. 그러니까, 이 글은 너에게 작별을 고하는 글이다. 또, 다가오는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안녕? 이라는 인사말로 시작한 관계는, 언젠가는 여지없이 안녕. 이라는 울림을 남기며 끝나기 마련이지 않나.


언제부터였을까. 너의 눈에는 흰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름 모를 한 보석처럼 까맣던, 그래서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싶었던 네 눈 한 중앙에 말이다. 그 때문에 난 강아지에게도 동공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구태여 알고 있지 않아도 될 사실임에 분명할 텐데…. 서리가 밤 동안에 조용히 피어나듯, 흰 얼룩은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어쩌면 여러 밤사이에 착실하게 쌓여간 자국일지도 모른다. 내가 ‘한순간’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 형태가 완연한 원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는 노견에게 흔히들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우리 가족이 ‘노견’이라는 단어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주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색채를 잃어가는 너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두 나무색 털들이 점차 하얗게 세어갔다. 그 결과라고 해야 할까, 너의 가슴팍 한복판에 하얗게 자리했던 털들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두운 마룻바닥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진했던 너는 어디로 갔나. 오늘 아침, 잠에서 깬 내 곁을 지키던 너의 등판을 바라보고는 문득 우울해지고 말았다. 호두 나무색이라기 보다는, 호두 겉껍질의 밝은 갈색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서 선후 관계를 찾을 필요가 있겠냐만, 가끔은 네 털이 세어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얗던 가슴 털이 단순히 그 범위를 넓혀간 것이라고, 한 생명체가 어른이 되면서 맞이하는 당연한 변화의 과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아주 작은 토이 푸들이라는 말을 듣고 데려온 네가 중형견에 맞먹을 정도로 커진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하고 의구심을 품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뿌리가 얇은 믿음만큼 헛된 것은 없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 뿌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정도가 심하겠지. 네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 급조한 가설은, 너의 눈 한복판에 진득하게 눌러앉은 얼룩을 바라볼 때마다 산산조각 나곤 했다.


‘강아지들은 평생 아기다…’ 어리광을 부리는 너를 보며, 종종 엄마가 입에 올리곤 했던 말이다. 그래서 사람과는 다르다고, 강아지들은 커가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씀하시곤 했다. 나에겐 그 말이 조금은 냉정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말이 좋았다. 그만큼 변함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너는 기나긴 세월 동안 사춘기 한번 겪지 않았다. 기쁘면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네가 늙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유독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변함의 과정을 생략하고 찾아오는 노화가 어디 있나- 하면서.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너는 실제로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나. 어느 때고 활발하던 너는 쉽게 지치고, 더할 나위 없이 기민하던 눈과 귀는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해가는 것이 보일 정도다. 복도에 울려 퍼지던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우리 가족과 남들을 구분하고는 했던 너는, 현관의 중문이 열릴 때까지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우연히 문 앞을 어슬렁거리던 네가 도어락 소리를 들었을 때, 중문의 틈새 유리창 안을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돌리는 너를 보기도 했다. 신발을 벗는, 그야말로 코앞의 가족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나.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서는 너. 그런 너를 직접 마주했던 나는 신발 끈을 풀다 말고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더랬다.


너무나도 가벼웠던 너, 그랬던 너의 작은 발을 밟고 싶지 않아서 채웠던 방울. 총총거리는 걸음에 맞춰 울려오는 딸랑거림을 듣고 너의 존재를 알아차렸더랬지.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너는 등 뒤편으로 다가오는 우리의 존재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주쳐 지나가는 우리 발을 피하느라 급급하다. 신발을 벗기도 전에 반갑게 맞이하던 너의 환영을 받는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게 너무도 부자연스럽고 아쉬워서인지, 우리는 일부러 소리 내어 걷기도, 또 현관문을 조금 더 세게 닫기도 한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가 방울을 찰 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관념은 참으로 야속하다. 한순간에도 그 발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뚜벅뚜벅하는 소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전해진다. 그런데 그 무게는 왜 이렇게도 불공평한 것일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너와 나 사이에는 분명 같은 시간이 흘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56개의 계절 동안 우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양의 뚜벅거림과 째깍거림, 또는 두근거림을 공유했다. 그럼 같이 늙어가는 것이 맞지 않나. 나는 이제야 성장을 멈췄는데, 왜 너는 늙어버린 것인가. 보낸 시간은 같은데, 왜 남은 시간은 같지 않나. 나에게 남은 시간을 공평하게 나눠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이지 행복할 것 같은데. 그 양의 차이가 이렇게도 격렬해야만 하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죽음. 이 짧은 단어가 풍기는 끔찍한 냄새. 그는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더라. 처음으로 맡아보는 악취는 어느샌가 스멀스멀 형태를 잡고는 주위를 잠식해 나간다. 나에게도 아직 어려운 이 관념을, 너는 과연 이해할까. 누군가는 말한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생명체는 인간뿐이라고.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의 순간에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그런데 너를 보자면 그런 생각이 깨어진다. 요즘의 너는, 꼭 자신에게도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마지막 남은 몇 가닥의 불꽃을 불태워서라도, 우리의 눈을 마주쳐주고 또 꼬리를 흔들어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동생아, 나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디 남은 불씨라도 가혹히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라도 우리 곁에 조금 더 오래 남아주었으면 좋겠단 말이다.


끝이 어딘지 명확히 상상할 수 없는 어둠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것은 없다. 너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과, 그때가 과연 언제일지 가늠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함께 다가온다. 요즘의 나는 매일 그 끝을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없는 것. 바닥에 당연한 듯이 자리하고 있는 네 그릇에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는 것. 너의 기저귀 주변을 지날 때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 내가 밥을 먹을 때면 어김없이 옆을 지키던 네가 없는 것. 네가 사료를 씹는 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 알록달록하게 장만해놓은 네 겨울나기 옷들이 주인을 잃는 것. 그리고 그때가, 어느 한순간 갑작스레 찾아온다는 것…. 


마치 그 수가 명확하지 않은 해바라기 꽃잎을 뜯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하루가 넘어갈 때 마다 ‘너는 떠난다’, ‘너는 떠나지 않는다’며 말이지. 언제가 되어야 마지막 꽃잎을 떼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끝은 네가 떠난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는 때때로 견딜 수 없어진단다. 그러니 갑작스럽게 너를 꽉 껴안는 일이 있더라도, 잇몸을 한번 드러내고는 참고 넘어가 주렴. 네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호상(護喪)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네가 이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나 역시도 어릴 때는 그랬다. 나이를 조금 더 먹자, 호상이라는 뜻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런 것을 논하는 어른들의 머릿속을 이해하지 못했다. 떠나가는 이의 곁을 누군가가 지켰다는 것에 호(護)를 넣고, 반대의 경우에는 악(惡)이라고 하는지 말이다. 둘 모두 어쨌거나 죽음이니 슬퍼해야 할 대상이지 않냐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요즘은 어른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다. 네가 떠날 날이 차근차근 가까워질수록, 나는 차라리 그 끝이 호(護)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니까 정말 만약. 우리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 네가 떠나간다면….


앞서 적었듯, 나는 어릴 적의 너에게 손목시계를 주었더랬다. 넌 그것을 곁에 두고서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고, 커가면서 더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난 네가 꼭 손목시계의 째깍거림처럼 느껴진다. 잠을 자다가도 네가 옆에 있는지 깨고, 또 네 속에서 박동하는 작은 심장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한다. 어린 시절의 너에게 손목시계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고 하면, 너는 째깍거림 속에서 얼굴 모를 어미를 찾았을 것이고, 나는 콩닥임 속에서 너를 그린다는 것이다. 또 하나, 손목시계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지만, 나는 네가 한순간 뚝 하고는 굳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럴 때면 무력해진단다. 폭풍우를 앞두고 싸구려 우비 하나 걸치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보아도, 그것이 꼭 비닐로 만든 비옷만큼도 안 될 것임을 안다. 밀려올 거대한 감정의 비바람 앞에서,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젖어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도 난 그 우비 한 장을 꼭 껴안고 서 있어 보련다. 그것도 힘들다면, 쪼그려 앉아서라도 버텨보려고 한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글 적어봤자 뭐하냐고, 그런다고 강아지가 글을 읽을 수나 있을 것 같냐고 질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믿음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있다. 이 내용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너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흩날리는 꽃잎의 모습이던, 아니면 네가 좋아하던 껌의 모습이던지 말이지. 넌 어떤 쪽이 더 좋니?


동생아. 세상에는 다양한 것들을 믿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단다. 우리 엄마는 절에 다니고, 또 윤회를 믿는다. 혹시 너도 들었을까? 곤히 자고 있는 너의 귀를 들추고는, 다음 생에는 행복한 사람으로 태어나 거라-하고 말씀하시곤 하지. 반면에 나는 성당에 다니면서, 천국과 윤회를 믿는다. 네가 떠나가면, 그러니까 무지개다리를 건너 어딘가에 도착한다면, 그곳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지내주라. 집 밖을 나설 때면 여태껏 너를 옭아맸던 목줄 따위는 없이, 그저 맨몸으로 훨훨 뛰어다녔으면 좋겠다. 곁에 피어있을 모든 꽃들의 냄새를 맡고, 땅에 떨어진 것 어느 하나라도 괜찮으니, 아무거나 입에 넣어 맛을 보곤 했으면 좋겠다.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 동명의 친구와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봤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날 때라면, 정말 한 번쯤이라도 좋으니 뒤돌아 봐주라. 이런 좋은 곳에 왜 형은 없는 건지, 궁금해 해주라.


아가야. 우리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동안 네 몸에 묻히고 다녔던 온갖 냄새를 나에게 전해주고, 새로 사귄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렴. 온갖 곳을 뛰어다니느라 묻은 흙탕물을 털어대도 혼내지 않을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털이 자라도 괜찮단다. 네가 나를 보고 웃어주기라도 한다면 난 널 찾을 수 있어. 우리는 같은 곳에 덧니가 있기에 그러고는 곧, 이번에는 함께 태어나자. 그 어떠한 형태를 지닌 존재라도 좋으니, 동일한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한 쌍으로써 말이야.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는 것 같다. 


그럼 이젠 정말 안녕. 안녕.

매거진의 이전글 단편소설 : 봄이 기다리겠죠 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