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파리는 유난히 더웠다. 반소매 셔츠마저 훌훌 털어버리고 싶던 그날, 그는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파리 마리 지구였다. 그녀는 빨간 민소매 차림으로 잔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그는 마리 지구 트레이옹센터에서 열리는 번역 검수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러 걷고 있었다. 보통 앞만 보고 걷는 그가 마침 그때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저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만 이해할 뿐이다. 그는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쁘긴 했어도 그녀를 그냥 지나 칠정도는 아니었다. 십 년 만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처음이었다. 그녀는 동그란 눈을 치켜뜨고 놀란 고양이처럼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곳은 유난히 더운 여름날의 파리였고, 프랑스어가 아닌 언어로 말을 걸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을테다. 그녀와 그는 가벼운 인사치레를 나눴고, 주소를 교환하고는 헤어졌다. 우연적이고도, 단순한 만남이었다. 그런 우연은 인생에 한 번, 아니 두 번쯤 경험할 법한 그런 만남이었다.
유리로만 만들어진 건물, 트레이 옹 센터는 1980년 프랑스 현대문학의 선구자라 불렸던 주셰튀 트레이 옹을 기념하기 위해 현대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오직 문학을 위한 공간으로만 사용되기를 바랐던 트레이 옹의 유지를 받아 15년째, 오직 문학과 관련된 업무만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에 졸업하자마자,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라고 했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언어를 배울 필요도, 무언가를 할 생각도 그의 머리 속에는 없었다. 그저 파리라는 도시에 살고 싶다는 생각, 딱 그 정도였다. 프랑스 주재 외교관이었던, 삼촌 덕에 별로 어렵지 않게 지금의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한국 소설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기 전에, 간단한 오류만 수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작은 불만조차 갖지 않았다. 일을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았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 덕에 돈을 충분했고, 프랑스어는 모국어보다 더 잘했다. 그의 삶은 항상 그럭저럭 훌륭하게 돌아갔고, 그 또한 그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이 곳은 파리였고, 그는 파리를 사랑했다.
1990년 3월 20일, 그 날은 그가 그녀를 처음 마주한 날이었다. 20살,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서있었다. 아담하지도 크지도 않은 체구, 얼굴은 예뻤다. 그녀는 그에게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그러라고 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는 문학을 배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오히려 그는 항상 그들이 내뿜는 역겨움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 생각했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함께라는 말을 쓰는 건 그 상황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둘은 대화를 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쨌거나, 둘은 마지막 수업까지 그렇게 함께였다. 어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는 그를, 그녀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밥을 함께 먹자고 했다. 그는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거절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를 졸졸 따라왔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불러 세웠지만, 그는 멈출 어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뒤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로소 그가 멈춰 돌아 섰을 때,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그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뭘 해야 될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밥 먹자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음을 멈췄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들의 만남이었다.
검수를 끝내고, 건물 밖을 나서자 굵은 빗줄기가 하나둘씩 떨어졌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짙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야외 테라스를 차지하던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나기 바빴다. 그는 우산을 펼쳐지고 어두운 파리의 거리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자동차를 싫어했고, 그 흔한 운전면허증도 따지 않았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고등학생이었던 무렵, 자동차 뺑소니를 당했다. 두 분 다 30분 동안 방치된 채,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그가 혐오하는 모든 것은 이유가 있을지 몰랐다. 그저 굳이 그는 그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뿐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도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아담한 방들이 펼쳐졌다. 르네상스(1800년) 시대에 지어진 집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그는 아파트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했고, 별다른 고민 없이 계약을 맺었다. 1800년의 향수를 풍기는 그곳을 그는 보금자리로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그는 부엌에서 따뜻한 커피를 끊여서 테라스로 향했다. 정면으로 에펠탑이 보였고, 왼쪽으로 센 강, 오른쪽으로는 오르셰 미술관이 자리했다. 비 오는 파리의 전경은 우울하고도 아찔하다. 압생트에 취해야만 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살을 선택한 그런 장소, 그런 비 속에서, 그는 살고 있다.
그녀는 밥을 먹는 내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어설프게 볼에 칠한 분은, 눈물로 인해 지어졌고, 눈가는 퉁퉁 불어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행동이 그의 눈에 읽혀 왔다. 그는 그녀를 보며, 떼 묻지 않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수함을 가졌다라 느꼈다. 그녀는 그의 미소에 자신감이 생겼는지 하나둘씩 질문을 던졌다. ‘몇 살이에요?’ ‘어디 살아요’ 그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같은 신입생이었고, 영문학 전공이었다. 밥을 먹고 나왔을 때쯤엔 분위기는 한결 수월해져 있었다. 물론 그의 과묵함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질문에 답은 빠짐없이 내놨다. 그녀는 그 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그런 그를 좋아했기에, 다른 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기 직전에, 그녀는 불쑥 그에게 좋아해요라 말하고는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있었고, 그 말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김질했다. 그가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는 첫사랑의 오묘함을 맛보고 있었다.
시큼하고, 묵직한 커피 향이 그의 콧가를 건드렸다. 테라스 한쪽에 쌓인 불어 서적 중 뒤테의 책을 쥐어 들고 그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