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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by 김 정

낡은 어휘의 자리 이동

과거에는 일상 속에서, 혹은 드라마 속에서 자주 들리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팔불출(八不出)”입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동료 사이에서, 가족 농담 속에서 흔히 오르내리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표현을 듣기 어려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랑할 거리가 없어진 걸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를 만나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가족과 일상을 공유합니다.
다만 그 방식이 조금 달라졌을 뿐입니다. 직접적인 말 대신, 간접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지요.

결국 단어만 낡아 익숙지 않을 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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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 밀린 관용어

팔불출은 본래 "여덟 달 만에 태어난 아이"라는 뜻에서 시작해, 시간이 흐르며 "자랑이 지나친 사람"을 풍자하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랜 시간 술자리나 드라마에서 흔히 쓰였지만, 이제는 고전적인 표현이 되어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는 어휘의 자연스러운 쇠퇴와 이동에 있지만, 이제는 무엇보다 발달한 SNS가 이를 대신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진 한 장, 짧은 글귀 하나가 곧 자랑과 표현이 되는 시대이기에, 이제는 굳이 ‘팔불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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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는 내 자랑

누구나 자랑할 거리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습니다. 인정받고 싶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기 때문이죠.
과거의 팔불출이 가족, 재산, 자식 등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면, 오늘날의 자랑은 조금 다릅니다.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어떤 멋진 장소에 있는지를 사진으로 공유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작 ‘나 자신’은 없습니다.
내 주변의 사람과 장소, 그리고 사물로 나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팔불출의 옛 모습이 형태만 달리해 여전히 살아 있는 셈입니다.

누군가 지인을 소개할 때도,
“그 친구는 정직해”라기보다는
“어디 출신이야”, “집안이 좋아”, “걔 친구가 연예인이야”라는 식으로 주변의 조건을 먼저 내세우곤 합니다.
마치 나 자신보다 나를 둘러싼 배경과 관계, 물건이 더 빛나 보이는 것처럼요.
정작 중요한 건 내 주변의 것들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자랑거리가 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팔불출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아도, 자랑은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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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에 대하여

“기쁨을 나누면 시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약점이 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랑은 조심스럽고, 슬픔은 감추려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랑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슬픔조차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눌 때 자랑스러운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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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불출, 부끄럽지 않은 자랑

팔불출은 원래 개인의 과한 자랑을 꼬집는 말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달리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성실한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고, 그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다면, 자랑은 숨길 일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가고, 즐기고 싶은 것을 마음껏 경험하며 느끼는 기쁨은, 시기심이 아니라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허상이나 과장된 포장이 아니라, 담백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자랑, 즉 팔불출은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한 나를 보여주는 행위이니까요.

나아가, 개인의 자랑을 넘어 국가적 성취에 대한 자랑은 더욱 의미가 깊습니다.
유명 스포츠 스타의 활약, 글로벌 기업의 성과, K-컬처의 세계적 인기 등은 내가 직접 이룬 것이 아니어도, 마음 깊이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때의 팔불출은 더 이상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함께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자부심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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